감실감실 다가오는 새 세상

황석영 <철도원 삼대> p545~p578, 17

by 김혜진

“경찰이 전평회관을 포위하고 배치되어 있는 가운데 군용 트럭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트럭 위에는 버젓이 각목이며 쇠파이프 곡괭이 자루 등으로 무장한 청년 수백 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대한노총원임을 자처했으나 대부분이 보수 정당의 청년단과 서북청년단이었고 그들 중 일정 때부터 경성에서 총독부의 조정 아래 폭력을 휘두르던 깡패들이 앞장섰다. 회관 입구와 층계 복도 등의 요소를 지키고 있던 노동자 보안대원들은 앞장선 폭력배들의 무력에 간단히 제압되었고 깡패들 중에는 총기를 지닌 자들도 있어서 총소리까지 요란했다.”(p555)


*****일철은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중앙위원이 되었고 해방 후 첫 노동절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승만과 군정관리를 배경으로 하는 어용 노조에 의해 폭력적 상황에 몰린다. 그들이 전평을 논하는 원리는 단 한 가지다. 바로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것이다. 저자 황석영은 글에서 말한다. 전평은 공산주의를 위한 조합이 아니다. 일제의 노동활동에 저항하며 이어져온 ‘항일투쟁의 결과물’ 일뿐이라고 한다. 그들이 조직이 된 이유는 민족과 백성을 위한 자발적 방어권을 위한 활동이었다. 하지만 조직을 유지해 나가는 큰 근간이 되는 사상이 공산주의가 있었고 어용은 이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일철은 이 사건 후 도피의 삶을 살게 된다.




”군정의 강제 미곡 수집과 미곡 반입 금지령에다 때마침 퍼지고 있던 호열자의 전염을 방지한다고 통행금지까지 시켜서 식량 반입이 불가능해지면서 대구의 기아상태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전매청의 연초공장에서는 담배 잎을 마는 종이에 바르는 풀이 나오면 직공들이 그 풀을 다 먹어치울 정도였다. 굶어서 힘이 없어 누워 있는 사람들을 미군과 경찰은 호열자에 감염되었다고 실어다가 환자들만 격리 수용된 곳으로 끌어다 놓았다. 기아 행진을 하고 시장실에까지 쳐들어간 아낙네들에게 쌀 대신 비누를 배급하겠다거나 살림 사는 여자가 쌀도 없느냐는 시장의 폭언이 밖으로 알려지면서 대중적인 분노가 일어났다.”(p560)


*****대구에서 시작한 봉기는 각 지방으로 격렬하게 번져 갔다. 해방의 달콤함과 희망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빼앗긴 들은 아직도 빼앗긴 상태였으며 그들의 삶은 변한 것이 없었으며, 주체가 달라진 폭압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것은 굶주린 배와 좌절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마른 외침은 불온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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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오는 초등학교 시절에 할머니 신금이에게 되물은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그랬다 치고 왜 우리 식구들은 힘센 쪽에 붙지 못하고 맨날 지는 쪽에만 편들었어요?/ 왜, 약한 쪽 편드는 게 싫으냐?/ 물론이지요. 너무 손해잖아요?/ 그러면 할머니는 감실감실 주름살 잡힌 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웃으면서 말했다. /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 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그리고 신금이는 덧붙였다. /오래 살다 보면 알 수 있단다. 서로 겉으론 내색을 안 할 뿐이지 속으론 다들 알구 있거든./”(p564)


*****신금이가 어린 진오에게 해주는 말은 가만히 곱씹어 보면 정말 눈물 나는 우리 역사의 모습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는 강한 적이 최고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약하게 땅 속에서 풀뿌리처럼 얽혀 견디는 약한 사람들에게 넘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낸 역사를 가지고 있다. 나이가 든 신금은 아프게 살아온 세월을 탓하기보다 감실감실 다가오는 새 세상이 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결국에는 이긴다는 것을 손자 진오에게 말해주고 있다. 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눈앞의 이익에 몰려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결국 진오의 싸움은 결과와 상관없이 이기는 싸움이다.




“/우리도 이일철이 이번 사건에 직접 관련이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 되겠지. 그 사람 이젠 여기서 살 수 없소. 차라리 저쪽으로 넘어가는 게 살길이겠지요./ 나중에 시아버지 이백만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었던 신금이는 말하곤 했었다./ 형사나 끄나풀 중에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다는 건 맞기두 하구 틀리기두 하지. 역할을 저희끼리 정하기두 하지만, 이런 경우는 보험 들어두자는 게야. 세상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p578)


*****일철이 소속되어 있던 조직에서 밀정 야마시타 최달영(개명 후 최용)을 제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더욱 집요하게 일철을 쫓는다. 하지만 늘 말이 없던 이백만은 무심한 듯 일철을 버린 자식 취급하는 척한다. 하지만 그들도 안다. 그들이 얼마나 억지로 묶어서 잡아들이려고 하는지. 그리고 경찰 중 한 사람은 조용히 일철에게 월북할 것을 권한다. 그것이 난세에 가진 자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신금은 말한다. 앞으로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바뀌는 경험을 몇 번이고 하게 될 것이다. 신금은 그것을 그냥 안다. 그리고 그때 이 땅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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