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철도원 삼대> p579~p598, 18-1
“김근식은 이일철을 만나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이이철 동지와 헤어지던 일이 꼭 어제만 같습니다./ 일철은 아우를 회상 하며 그가 눈물을 보이는 것에 자기도 모르게 감동을 받았다. 현재 자신이 처한 막다른 상황을 이철이는 몇 번이나 겪어냈을까. /아우의 활동 내막은 해방이 되고서야 주위에서 듣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왜정 때와 다름없다고들 하더군요./ 일철의 말에 김근식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는 수백만의 인민대중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이러한 혼란이 계속될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죽고 없어진 뒤에라도 새로운 사회는 오게 되겠지요./”(pp584~585)
*****최달영의 피습으로 압박해 오는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이일철은 관악산 아래 옛 은사의 집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곧 경찰은 들이닥쳤다. 그래서 독자노선을 유지해 비교적 평온한 인천지부로 피해 김근식을 만났다. 그를 본 이일철은 늘 그런 삶을 살다 간 동생 이철이 생각에 눈물이 쏟아진다. 그의 암담한 마음에 김근식은 희망적인 말을 건넨다. 아무것도 모르고 착취되고 억압받은 일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은 깨어 있다는 것이다. 많은 피의 대가가 있었고 부딪히며 살아냈기에 알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는 늘 그렇다. 곧 망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서도 앞으로 전진했고 이겨 나왔다. 김근식은 지금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이렇게 걸어가다 보면 만나게 될 새로운 세상을 일철에게 말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살아내는 이유 중 하나이다.
“지산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소년 시기에 기관수였던 아버지가 운전하는 특급열차를 타고 만주의 광야를 달렸던 강렬한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철도국에 들어가 아버지처럼 기관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해방 이후 시국 변화를 겪어오면서 지산은 그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역시 수배 중인 전평 철도국 간부의 아들인 이지산은 신원 조회 때문에 입학이 거부되었다.”(p578)
*****차갑게 언 겨울 땅에도 다음에 싹 틔울 움이 숨어 있다. 기관수 일철의 아들은 자연스레 자신도 철도 기관수가 되고 싶어 했다. 어느 집이나 집안에 내려오는 직업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다. 더구나 일제 강점기 누구나 선망의 직업이었던 기관수 아버지를 따라 만주 여행까지 다녀온 지산이었다. 하지만 그 움은 싹을 틔우지 못할 것을 자신이 어쩌면 더 먼저 알고 있었다. 그의 꿈은 퇴로가 막힌 현실 공간에 갇혀 버린다. 삼촌인 이철, 아지 일철의 삶은 결코 자신들만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불온이라는 굴레가 덧입혀져 있는 거대한 장막은 지산 가족의 삶 전체에 드리울 것이다.
“허겁지겁 말없이 식사를 마친 지산이 물끄러미 바라보며 기다리고 앉았던 신금에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 저 아버지 찾아……갈라구요./ 신금이는 아무 대답 없이 앉아 있더니 눈이 그렁그렁해지면서 고개를 숙였고 눈물이 무릎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 아버지 보고 싶지?/ 네, 여기선 모두 퇴학시키고 구속할 거예요./(중략) /인천으루 가거라 선옥이 이모가 널 도와줄 거야. 아버지 만나고 나서……얼른 돌아와……/”(p578)
*****‘얼른 돌아와.’ 남편에 이어 자식까지 북으로 보내야만 하는 신금이의 마지막 진심 어린 말이다. 민청에서 활동하며 시위대의 선두에 선 지산은 검거대상이 되며 쫓겨 다닌다. 그리고 아버지가 있는 북으로 갈 결심을 한다. 아버지 일철도, 아들 지산도 모두 격동의 시간에 내몰린 아픈 자들이다. 하지만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며 그 모든 일을 감당하며 아들의 옷 보따리까지 싸야 하는 신금의 아픔은 누가 알아보아 줄까 싶다. 그저 꼭 다시 돌아오기만을 부탁하지만, 떠나보내는 아들에게가 아니라 가슴이 미어지는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묵묵히 술잔을 나누다 일철이 지산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타관 객지야.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 부자는 그날 밤 만취했다.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유행가 「신라의 달밤」도 부르고 가곡 「산유화」도 불렀다. 지산은 처음 먹는 술에 과음까지 해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새벽에 목이 말라 깨니 아버지도 쪼그리고 잠들어 있었다. 춥지는 않았으나 지산이는 발치에 늘어진 홑이불을 끌어당겨 아버지를 덮어드렸다. 부자가 평양 철도관사 앞길에서 작별할 때에 이일철이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가만히 말했다./ 엄마한테 가거라……/”(p598)
*****평양 철도학교를 마치고 기관수로 떠나는 아들에게 술잔을 건네며 일철은 말한다. 죽지 말고 엄마한테 가라고. 전쟁의 소식이 들리는 정세 속에 아들을 걱정하는 말임과 동시에 남겨진 신금을 생각하는 일철의 마음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끔 구구절절이 설명하는 말이 아니어도 아주 많은 감정을 건네받기도 한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철의 노랫소리, 가만히 아버지에게 덮어드리는 홑이불, 아들의 어깨를 토닥이는 아버지의 손길. 집 밖의 거대한 물결 같은 역사는 가족과의 말 없는 손길마저도 갈래갈래 헤집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