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밖의 것의 단순한 아름다움'중에서 발견한 나의 도둑맞은 시간들
"모든 게 변했다. 자기 자신의 일부를 빼앗긴 느낌, 과거를 도둑맞은 느낌이다. 마치 가운데 장이 찢겨버린 책처럼 시간이 뭉텅 잘려나갔다"
P163에 나오는 이 대목, 지난 4년 동안 내가 겪었던 모든 불합리한, 모든 비상식적인 일들을 가장 잘 기억나게, 가장 잘 설명하는 대목이어서 오호, 이렇게 나를, 나의 4년을 가장 잘 설명한 말이 있다니, 눈여겨보면서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또 휴대폰의 메모지에 또 적었다.
지난 4년은 내 인생의 오점이요, 내 인생의 십자가였었다. 책의 한 페이지처럼 뭉텅 잘려 나가서, 기억 상실증 환자처럼 다시는 그 기억이 떠올라지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4년 내내, 나는 내 뇌에서 떠올라지는 그 아픔의 사건들이 내 뇌에서 숨 쉬고 자라고 사는 게 너무나 싫었다. 그 사건들, 시간들을 오려내서 잘라내서 버리고 싶었다. 다시 행복했었고 평온했었던 나의 삶으로 온전히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알고 있다.
똑같은 공간, 똑같은 시간은 이제 없다. 그게 인생이고, 아쉬운 게 인생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 라인댄스 수업을 한 후, 기차를 기다리면서 책 읽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나를 사로잡았었던 그 대목을 잠시 잊고 있었다.
오늘 화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헤르만 헤세의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P235 "지난겨울, 심란하고 힘든 마음으로 시내에서 빈둥대며 보낸 그 겨울에 <마술피리>를 세 번 더 들었다. 이 시간들은 헛되이 보낸 나날들로 착잡하고 혼란스러운 나를 향해 영롱한 빛을 비춘다' 이 대목은 지난 2023년 10월부터 최근의 나날까지 내가 보낸 그 상실감의 시절, 허무와 허탈의 시절 속에서 도슨트 수료, 전시회, 음악회, 연주회에서 나의 아픔과 상처, 괴로움, 트라우마를 씻으려고 보낸 나의 노력들, 기특할 정도로 가상한 시간들을 보낸 나를 잘 설명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읽던 도중 떠올라졌다. 지난주 금요일에 읽었던 그 책의 대목이, 그래서 그 대목을 찾아 다시 읽어보던 중에 갑자기 글쓰기가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고 화면 앞에 앉았다.
도서관이다.
도서관 1층에는 책에 묻은 먼지와 오물을 제거해 주는 바람기계가 있다. 5권을 대출할 수 있기 때문에 앞서 1권을 그리고 며칠 후 책 3권을 더 대출했다. 2권은 헤세의 시와 수필이다. 바람기계에 책 3권을 올려놓은 후, 잠시 잠깐 나눈 대화다.
"나는 헤세를 제일 좋아해요. 나는 명상록을 좋아합니다."
"뭐, 헤세! 나는?"
"훗훗, 헤세는 철학자 중에서 제일 좋아한다는 말이에요."
"하핫핫, 철학자 중에서."
요즘은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좀 알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직접적 화법으로 말한다. 웃음이 나왔다. 어린애 같이 엉뚱한 사람을 질투하다니, 그런 그 사람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렇게 귀여운 남자가 지난 4년은? 그건 누굴까?
지난주 토요일도 어느 날과 똑같이 열심히 하는 하루, 편안한 하루, 평온한 하루로 지내고 마무리 잘한 날이었다. 지난주 일요일도 아침에는 여느 날과 똑같이 그는 마라톤, 나는 반신욕, 화장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더 긴 몇 시간을 우리나라 가곡, 샹송을 들었다. 그는 이 즐겁고 평온한 아침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다.
"일요일 아침에 당신과 이렇게 가곡을 듣고 있으니, 참 즐겁다. 좋다."
각자의 하고 싶은 일, 시간을 존중하면서 아름다운 노랫말, 음률의 가곡과 샹송을 들으며 심취하고 또 따라 부르기도 하고, 흥얼거리기도 한 그 공간과 시간은 평온한 좋은 아침이고, 그 관계는 좋은 부부 사이다.
일요일 오후도 잘 지나가고 흘러갔다. 저녁시간, 짜장면을 먹으러 가서 며칠 동안 나는 흔들렸다. 그 공간을 일순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대각선 방향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어떤 남자가 전화를 하면서 대화 속에 욕이 섞인 말들 때문에 뛰쳐나가고 싶었는데 간신히 참고 있을 때 그는 요행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 남자의 전화 대화 이전에 또 내가 참고 있었던 내 심기를 건드린 사건이 있었다. 눈알이 이리저리, 시선이 이리저리, 내 앞에 마주 보고 있는 사람에게 내 눈이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눈을 보고 이야기하려고 하면 시선이 가면 얼굴이, 눈이, 눈의 시선이 이쪽으로 고개를, 저쪽으로 고개를, 시선이 대각선 방향으로 이리저리 옮겨진다. 늘 마주 대하는 모습이다. 어느 날 카페에서 나는 그에게 이렇게 조언을 했었다.
"당신은 참 이상하다. 내가 얼굴을 보고 눈을 보고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말을 하면 얼굴이, 눈이 다른 곳으로 열심히 본다. 그리고 내가 책을 보거나 뭘 마시려고 하거나 다른 행동을 하고 있으면 나를 보고 있다. 왜 그렇게 반대로 하지? 참 웃긴다. 왜 뭐든지 반대로 하느냐."
자기 자신이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일침을 가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즐겁고 활발했던 분위기가 뭔가 서먹하게 느껴졌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뭔가 갑자기 냉기가 들어차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도, 나도 이내 활발하고 즐거운 분위기로 바꾸려고 노력을 했다. 나는 "이제, 가요." 일어섰다. 그리고 나가면서 다른 화제로 대화를 하면서 즐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그 공간과 시간은 지나갔었다.
그는 지난 4년 내내 그랬었다. 말을 좀 하자, 대화를 좀 하자, 상의를 좀 하자. 그러면 모양새는 앉았는데,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재치거나 벨트를 만지거나 갑자기 일어나서 신발의 먼지를 물티슈로 닦거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사람이 대화를 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왜, 그렇게 하냐고 물으면 듣고 있다. 들으면 되지 않느냐?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는 왜 그러면 눈을 보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느냐? 물으면 그 사람들하고는 처음 하는 말이니까, 한 번이니까, 참 엉뚱하게 변명을 하고, 해명을 했었다. 내가 대화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감정을 잘 전달하는 나의 표현법으로 해야 한다고 심리학에서도 타인과 대화를 할 때는 이렇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그의 솔직한 감정에 대해서 나는 물었다.
그는 직장에 다닐 때 사회복지학 공부를 했었고, 상담을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반듯하고 성실하고 타인을 잘 배려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평판이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알고 있다. 대화를 잘하는 방법을.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말을 하면 어린애처럼 가르친다고 또 나를 조롱했었다. 그는 도통 내 말만 듣지 않으려는 심술보 터진 어린애 같았다. 겉은 성인인데 속은 아이였었다. 그를 일깨우는 게 힘들었고, 나는 참아내는 게 힘들었다.
내가 그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고, 이혼을 통보하고, 그도 나의 마음이 바뀌고, 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판단을 한 후부터 조금씩 바뀌었다. 조금씩 바뀌는 그 시간 동안에도 나는 참아내려고 했었고, 잘 참아내고 있었다.
지난주 목요일 오후쯤 아들이 전화를 했었다. 그동안 내가 나가고 난 뒤에 수급자가 많이 줄어들어서 그 수급자를 다시 채우는 동안 바빴던 이야기, 평가 준비를 하면서 바빴던 이야기, 엄마가 보고 싶었다는 이야기, 그동안 전화를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엄마의 근황을 아빠로부터 듣고 있다는 이야기, 엄마의 건강을 염려하는 이야기, 엄마의 글을 어떻게 볼 수 있느냐는 이야기, 엄마와 식사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정확히 날짜를 꼽아보면 그날 이후, 아들의 전화가 온 날, 그 이후부터다. 지금까지 안 하고 있었던 그의 버릇이 또 나오고 있다.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콧방귀. 그 콧방귀를 대화 도중 수시로 자주 계속해서 뀌고 있다. 그 4년 동안은 조소요, 조롱이 섞인 콧방귀였지만 지금은 즐거운 대화에서 추임새로 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참기가 어렵다.
그리고 또 나를 힘겹게 만드는 두 사람끼리 마주 보고 있을 때, 해야 할 시선 처리, 교감의 시간에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것, 그의 미묘한 행동을 나는 안다. 그의 시선 때문에 나는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난감하다. 나의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그의 시선 때문에 나는 나의 시선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불편하게 만든다. 이 공간과 이 시간과 이 만남을.
지난 4년 겪었다. 그의 말과 행동 때문에 나는 지난 4년 심리학 공부를 했었다. 그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있으니까, 그를 알 수 없게 만드니까, 나는 공부를 할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지금도 사람의 말과 행동에 대해 심리 공부를 하고 있다. 그 심리 공부를 한 덕분에 일부분이지만 나는 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고, 나의 상처와 아픔, 트라우마를 다독일 수가 있었다.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심리. 100%는 아니지만 거의 50~70% 정도는 맞다고 생각한다. 예측이 가능해서 이제는 사람으로부터 덜 상처를 받고 있다.
아마 그는 작은 미묘한 자기만의 만족일 것이다. 심통을, 심술을, 상대방의 심기를 교묘하게 건드리는 것, 나는 알고 있다. 자신만의 소심한 복수임을.
유튜브 영상으로 시름을 달래거나 아픔을 위로하거나 마음 챙김을 하거나 평온을 찾으려고 애를 썼었다. 그리고 그에게 전문성 있는 말들로 일깨우려고 했었다. 그에게 어제 이런 숏폼을 보냈다. '배우자에게 실망하는 순간 5가지', '귀중한 인연을 놓치지 않은 법 4가지'를 어제 오후에 보냈다.
1이라는 숫자가 없어진 것을 보니, 읽었나 보다.
오늘 새벽 우연히 본 마음챙김 숏폼, "힘들 때 들으면 눈물 나는 명언 9가지"가 큰 위로가 격려가 된다. 그중 2가지가 마음에 남는다. 가장 큰 영웅은 가장 큰 고통을 견디는 자가 아니라 그 고통을 다시 일어나는 힘으로 이용하는 자다. 모든 상처에는 치유의 능력이 숨어 있다.
떠오르는 분노의 기억으로 인한 재현되는 분노가 지난 4년처럼은 아니지만 여전히 아프다. 아픈 것은 똑같다. 그러나 그 아픔을 견디는 것은 달라졌다. 소비되는 에너지로 방출되는 에너지로 다 쓰인 지난 4년을 되풀이하지는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다. 해봤기 때문에 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지를.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죽이는 지를. 27년 들인 공 때문에 갖고 있었던 미련, 그 미련이 있어서 부부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미련으로 자신을 가혹하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련조차 자유로워졌다. 나를 가두어두지 않게 되었다. 잠시 소나기가 와서 피할 곳을 찾으려고 허둥댔었고, 피했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또 햇볕이 쨍하고 축축해진 땅을 단단하게 해 주고 더러운 때는 씻겨 나가서 세상이 깨끗하게 환하게 보인다.
오늘은 스칼렛 오하라의 이 말이 마음에 든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고. 오늘 나는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평소처럼 화요일의 루틴을 잘 지키는 일상생활을 하고, 나를 위한 생산적인 에너지로 하루를 보낸 날로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