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초침

<은유의 잔향> Episode 2

by 은유의 잔향

부제: 예고도 없고, 이유도 없었다.


부딪힘은 언제나 조용히 다가왔다.

한 번도 연습해 본 적 없는 표정을 배우고,

말보다 먼저 계산되는 침묵을 익혔다.


사랑은 언어가 아님을

온몸으로 실감하던 시간.


시계 속 분침과 초침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흘러가고 있지만,
시간이 흐름에도
나는 조금씩 굳어가던,

괴이한 시간들.


무언의 기대를 이해하느라 애쓰고,

틀린 것이라 말하는 일들을

줄이는데 최선을 다하던 시간들.


시계가 흐르는 속도에

나를 맞추려 할수록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온기는 여전히 없었다.


겨울이 지나, 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서늘하던 날들.
옷깃을 여미고,
매무새를 조금 더 다듬어보아도
좀체 나아지지 않던 추위.


허겁지겁 무언가를 채울수록,

허겁지겁 무언가가 비워지던.


어디서 퍼져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냉기였던 지라,

냉기를 막을 길이 없어
추위를 ‘표현하는 것’보다

추위를 ‘체감하는 것’이

더 빨랐던 순간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날들.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서도

정각마다 고개를 들고,

일정한 리듬으로 호흡하며

하루를 반복하던 날들.


사람의 말보다, 활자에 더 익숙해지고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표정을 다듬는 것이

더 익숙한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상이 나를 멈추게 해도

나는 그렇게 나를 시간과 함께 흘려보냈다.


시간은 나를 데려가듯,

또 밀어내듯 나와 함께 흘러갔다.


오늘의 잔향 —

Max Richter – “Infra 5”

(이 글을 쓸 때 흐르던 음악.

멈추지 못한 시간, 굳어가는 마음의 초침.)


※ 이 글에 언급된 음악의 모든 권리는 해당 아티스트에게 있으며,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 이혜미, 『은유의 잔향』 중에서. 인용 시 출처 표기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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