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끝에서

<은유의 잔향> Episode 2

by 은유의 잔향

부제: 멈춤은 사라짐이 아니었다


하루의 끝은 언제나 불빛이었다.

어딘가에 비친 얼굴은 낯설 만큼 피곤했고,

서둘러 걸어가야 할 이유도,

기다려야 할 누군가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바쁜 걸음 사이에서,

나는 서 있었다.

불빛이 바뀌어도,

그렇게 나는 멈춰 있었다.


아침의 커피잔은 미지근했고,

어제를 지난 오늘의 햇살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쏟아졌다.


무기력 그 너머엔,

조용한 안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안도를 발견하고 나서야,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재촉이 끝나고,

피로는 멈춤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지 모른단

이상한 생각에 젖어들었다.


늘 분주히 애쓰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는데

거꾸로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멈춤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잃어가는 게 아니라,

다시 살아낼 준비를 하는

그 어딘가를 표현하는 단어일지도.


멈춘다는 건,

사라짐이 아니라 살아남는 일이었을지도.


끝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걸음의

또 다른 새 이름일지도.


오후의 햇살이 제 색을 잃어갈 때쯤

세상은 멈춘 적이 없었고,

나는 단지,

그 한가운데서 잠시 멈춰 있는 이 저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는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오늘의 잔향 —

Nils Frahm – Ambre

(이 글을 쓸 때 흐르던 음악.

멈춤의 리듬과, 다시 살아날 호흡 사이에서.)


※ 이 글에 언급된 음악의 모든 권리는 해당 아티스트에게 있으며,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 이혜미, 『은유의 잔향』 중에서. 인용 시 출처 표기 필수.

작가의 이전글멈추지 않는 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