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새벽에 태어난다.

<은유의 잔향> Episode 2

by 은유의 잔향

부제: 끝에서 비로소 시작이 열린다.


어느 때엔가

잃어버린 것들 때문에 멈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은 단 한 번도 나에게 ‘멈춤’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먹고, 걷고, 일하고, 깨어 있었고

그 ‘지속’ 자체가

삶을 어딘가로 다시 밀어 올리고 있었다.


감정이 움직여야 세계가 움직인다고 믿던 시절을 지나

어느 순간부터는

세계가 먼저 움직이고

감정은 그 뒤를 따라오는 구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단순한 반복 속에서도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이미 회복되고 있었고,

‘새로운 나’가 되려 하기보다

‘지금의 나’로 더 오래 남아 있는 방식이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했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조차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었다.

끝도, 이별도, 상실도

모양만 달라졌을 뿐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익숙한 걸음,

되돌아오는 생각,

변하지 않는 호흡,

그 미세한 일상들이

다시 삶을 이어 붙이는 실이 되었다.


내가 여전히 움직이고,

선택하고,

반응하고,

살아 있기 때문에

하루가 매번 다른 결로 시작된다.


성숙은 어느 날 거창하게 도착하지 않았다.

대신
식탁에 컵을 내려놓는 방식이 달라지고,

메신저에 답하는 속도가 변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 문장을 다시 읽게 되는,

그런 사소한 변화들로 스며들었다.


나는 결심으로 변한 적이 없다.

언제나 미세한 움직임이

조용한 변화를 만들었다.


매일 같은 일상을 반복하면서도

매일 새로운 선택이 생기고,

매일 다른 감정이 깨어난다.


하루는 반복이 아니라,

조금씩 달라지는 연속이고,

그 달라짐 속에서

나는 계속 태어난다.


어제의 나는 이미 지나갔고,

오늘의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내일의 나는 어떤 결로 깨어날지 알 수 없다.


그 불확실함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이유는

변화가 커서가 아니라,

이미 매일 조금씩 태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잔향 — Ólafur Arnalds – “We Contain Multitudes”

(이 글을 쓸 때 흐르던 음악

여러 겹의 내가 천천히 드러나며

하루마다 다른 결의 날 보여주었다.)

※ 이 글에 언급된 음악의 모든 권리는 해당 아티스트에게 있으며,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 이혜미, 『은유의 잔향』 중에서. 인용 시 출처 표기 필수.

작가의 이전글불안과 공존하는 성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