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며 견딘 시간들

<은유의 잔향> Episode 3

by 은유의 잔향

부제: 사라지는 것들 사이에서 버티는 마음


살아내기보다

지워내는 일이 더 분주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은 뒤로 미루기 부지기수였고

가고 싶은 길은 길의 형태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쉬고 싶다는 마음마저

어른스럽지 못한 욕심 마냥 느껴져

그 자체만으로도 스스로를 채근하던 그런 시절.


즐거움보다 책임을 상기하기 바쁘고

나를 채우는 일보다

무언가를 메우는 데 더 많은 힘을 썼다.


취미나 취향 같은 것들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희미해졌고,

여가의 시간은 눌려 잦아들었으며,

감정의 결은 매일 밤 조금씩 침전되었다.


희생이란 단어가 적합하지 않은 것은,

희생은 선택적 잃음을 말하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그때 나를 잃음과 동시에

소중한 걸 지킬 수 있었다.


희생이나 상처가 아니라

묘하게 단단해지는 경험이었다.


생의 모든 순간엔,

사라지는 동시에 익히는 것들이 있었고,

포기하는 동시에 얻어지는 결도 있었다.


고단했음은 분명했지만

잘 알고 있었다.

성장통임을.


어차피,

지워진 만큼.

나는 다시 쓰이게 될 거란걸.


많이 지워지는 건,

다시 쓸 수 있는 여백을 많이 얻기 위함이란 걸.


지키고자 했던 생의 순간들과

삶의 여백을

그렇게 나는 다시 얻었다.


오늘의 잔향 — AURORA – Runaway

(이 글을 쓸 때 흐르던 음악.

잃어버린 것은 없었다. 뒤로 미뤄진 것들이지.)

※ 이 글에 언급된 음악의 모든 권리는 해당 아티스트에게 있으며,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습니다.


ⓒ 이혜미, 『은유의 잔향』 중에서. 인용 시 출처 표기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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