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주 Feb 28. 2024

84

FEBRUARY.28.2024

수없이 많은 단어가 머릿속을 휘젓고 다닌다. 너무 많기도 혹은 얕기도 한 단상들.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무언가가 떠오르고 그를 지겹게 쫓다가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르익으면 그림이든 글이든 걸맞은 도구로 작업물을 낸다. 마음에 드는 작업물을 만들었을 때 얘기다.

 글쎄, 언제부터- 였을까? 미술로써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위치를 바꾸어 평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기억해 내려니 이미 꽤 오래전부터 강렬하다 느낀 감정이나 이야기를 ‘표현할 만한 화두인가’ 하는 저울에 올리기 시작했다.

 감흥을 주는 모든 순간에 ‘할 만한’과 ‘쓸모 있는’에 대해 먼저 재단하고 있다는 점이 스스로도 매우 안타깝다. 사실은 안타까운 정도가 아니라 심각하기까지 하다. 이렇게 되면 작가로서는 두 손이 묶인 것과 다름없고 자유를 잃게 되고 재미가 없어진다. 작가에게 자유와 재미가 없는 상태는 노란불도 아닌 빨간불이다. 그러면 에라이 멈춰야 할까. 뭐 언젠가 멈추게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멈출 수 없으니 반대로 생각해 본다. 표현할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억지로 찾지 말고 일단 자유와 재미부터 먼저 쥐여주자. 

 캔버스와 종이를 한쪽으로 치우고 (나에게 그들은 또 다른 화이트 큐브와 같아서 그 규격을 버려보기로 했다.)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생각도 버려보자. 그저 무언가 엉망이어도 되는 망쳐도 되는 무엇. 메시지나 의미 부여란 없는 터치를 늘어두어도 되는. 작업실 한편에 시트지가 다 떨어져 나간 서랍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쓰고 버려야지 했던 저렴하고 무거운 서랍장인데 두 번의 이사를 끝까지 따라왔다. 서랍장 위에 물통을 올려두고 고민 없이 젯소를 들이붓고 넓적한 붓으로 휘젓는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시트지를 남김없이 떼어버리고 참방거리며 붓으로 아무렇게나 칠한다. 딱히 골고루 칠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마구 칠한다. 어라 웃음이 난다. 나 참 이게 뭐라고 재밌다. 하루 정도 말려두니 자연스럽게 얼룩지고 까칠까칠한 얼굴을 드러낸다.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좋다. 오래된 나무 같기도 하고 죽은 나무 같기도 한 표면에 연필을 들고 무얼 그릴까 생각한다. 잠시 긴장감이 돈다. 순간 또 재단하려고 하는 마음. 당장 연필을 던지고 좋아하는 색의 물감부터 주욱-짜고 신나게 쓱쓱 바른다.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그냥 그곳에 발리거라 하고 중얼거리니 또 웃음이 난다. 어릴 때 그림 그리던 기분. 맞아 재밌었지- 싶다. 쓰고 싶은 색의 물감이 떨어졌고 자연스럽게 그리기도 멈췄다. 

아직 미완성인 그림은 음- 모르겠고, 일단 기분이 좋다. 자유로움과 재미를 느꼈으니 시작으로 봐도 될까? 너무 이른가 싶지만, 무엇이라도 멈추지 않고 해 볼 테다. 안되면 내일 또 안되면 내일 그래도 안되면 내일 계속해보다 보면 되는 날도 있을 테지- 호흡도 짧고 인내심도 없고 금방 질리고 싫증도 잘 내면서 그림에서만큼은 승부사 기질이 있는 건지. 이기고 지는 것 없는 놀이터에서 재미를 위한 한 판승에 오늘은 이겼다. 그걸 아는지 머릿속을 휘젓는 녀석들도 잠잠하다. 다시 빨간불이 켜진다고 해도 멈추지 않고 싶다. 오늘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8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