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14.2024
생과 죽음은 빛과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죽음을 삶에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뜨리려 하는 것일까?
삶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으로 가는 여정임이 확실하다. 다만 이 여정이 ‘언제’ 죽음으로 가는지가 확실하지 않을 뿐, 태어난 모든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래서 ‘언제?’에서 희망이라도 본 듯 불확실성에 죽음을 살짝 끼워 넣는다.
이는 노화를 대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수많은 시술과 수술, 바르는 약과 먹는 약이 즐비하고 어느새 ‘늙음’은 해결해야 하는 ‘병’으로 여겨지고 있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대부분의 장소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태어나서 죽음으로 가는 여정은 성장과 동시에 노화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고 그래 마땅한 일 또는 흐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수많은 세월, 노화와 죽음을 ‘극복’할 대상으로 간주해 왔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극복’이라는 단어는 진정으로 ‘노화와 죽음’에 쓰일 수 있는 표현일까?
삶의 마지막이 어째서 극복할 대상이 된 것일까.
가지고 있는 것의 상실. 예측할 수 없는 사후(사실 생도 예측할 수 없긴 마찬가지다. 다만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할 뿐)
죽음과 노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면에는 여러 가지 욕망이 숨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허망하기 그지없다.
만약 우리가 죽음을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일로 여길 수 있다면,
나무가 서서히 생기를 잃고 껍질을 벗기며 점점 작은 잎을 만들고 죽어가는 모습에 그것을 극복하려 여기지 않고 그저 나름의 깨달음을 얻어가듯. 우리도 ‘언제’ 일지 모르는 삶의 마지막으로 향하며 극복하려 하기보단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허망함보다는 충만함으로 끝나지 않을까. 글쎄. 아마도.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