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MBER.23,2022
꽤 오랜 시간 빈 종이 앞에서 아무것도 그릴 수 없었다.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 평가에 대한 부담감이 그리기도 전에 빈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는 더 이상 연필과 붓을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꾸만 중얼거렸다.
‘못 그려도 괜찮아. 장난으로 놀이도 그려도 괜찮아- 그렇게 그리는 것 마저 못하겠다면 안 그리면 되지. 그런데 네가 그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답은 늘 같았다.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결국은 스스로 살려 보겠다고 다시 펜을 들었다.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종이 위에서 어떤 사람도 줄 수 없는 긴장감과 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내가 나와 만나는 시간. 오늘의 부담은 바닥에 잠시 내려 두고, 소파 위에 무릎을 올리고 앉아 가장 좋아하는 캐롤을 틀어두고 노란 귤을 까먹으며 주황색 배를 가진 귀여운 녀석을 빨간 열매와 함께 그려본다. 오늘은 이런 나를 만나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