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오브뮤직>의 숨겨진 이야기

1. 패밀리 합창단

by 발길 가는대로

게오르크 루드비히 리터 폰 트랩(Georg Ludwig Ritter von Trapp, 1880-1947 향년 67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잠수함 사령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여하여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은퇴 장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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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부친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장교였기 때문에 제국의 귀족 신분이었기 때문에 폰 트랩은 리터(Ritter)라는 세습 칭호를 받았다.


1911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아가테 고베르티나 화이트헤드(Agathe Gobertina Whitehead)라는 오스트리아 귀족 출신 여자와 결혼했다. 그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뢰 발명가로 유명한 로버트 화이트헤드 경이었다.

잠수함.jpg 1915년 잠수함 위의 폰 트랩

당시 해군 대위였던 폰 트랩은 화이트헤드 어뢰 공장의 파티에서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두 사람은 곧 결혼한 후에 1921년 결혼 10년간 7명의 자녀(아들 2명, 딸 5명)를 두었다.

Whitehead-Agather_1909circa.jpg 1910년 폰 트랩과 아가테 화이트헤드

하지만 그의 아내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성홍열)이 유행할 때 아이들의 간호에 몰두하다 결국 정작 자신이 병을 얻어 1922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폰 트랩은 가족을 데리고 잘츠부르크 교외 아이겐(Aigen)으로 이주했다. (구글맵에 Von Trapp Family Home으로 검색)


한편, 마리아 아우구스타 쿠체라(Maria Augusta Kutschera 1905-1987 향년 82세)는 오스트리아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는 부모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출생했으며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10개월 때 폐결핵으로 죽었다.


결국 친척집을 떠돌던 그녀는 친척들의 학대를 받았고 결국 15살 때 집을 뛰쳐나와 친구 집의 가정교사, 보모 등을 전전하였지만 총명한 그녀는 비엔나에 있는 국립 교육 교사 양성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18세의 나이에 조기 졸업했다.


다음 해, 1924년 그녀는 수녀가 되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있는 논베르크 수도원(Nonnberg Abbey)에 들어갔다. 수녀 교육 2년 차가 되었을 때 그녀는 폰 트랩의 자녀 7명의 가정교사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폰 트랩의 집으로 들어갔다.


폰 트랩은 마리아가 그의 자녀들을 진심으로 돌보는 것을 보고 결혼을 요청했지만 두 사람은 25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겁에 질린 마리아는 수도원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실제 폰 트랩의 청혼은 "나와 결혼해 달라는 말이 아니라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달라"였다고 한다.


수도원 원장은 그녀에게 '신의 뜻'이라는 조언을 했고 이에 마리아는 폰 트랩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녀는 자서전에 '저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그를 좋아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나의 결혼은 아이들과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라고 했다.


결국 폰 트랩과 마리아는 1927년 11월 26일 (마리의 22세, 폰 트랩의 47세) 논베르크 수도원에서 결혼하고 세 자녀를 낳았다.


1929년 대공황이 닥치자 폰 트랩 패밀리는 재정적인 파멸에 직면하고 말았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대부분이 하인을 해고했고, 꼭대기 층으로 이사한 후 나머지 방은 임대를 주고 생활비를 충당했다.


잘츠부르크의 대주교가 프란츠 와스너 신부를 폰 트랩 가족에게 소개했고 신부의 소개로 알게 된 소프라노 가수 롯데 레만(Lotte Lehmann)은 우연히 폰 트랩 가족이 노래하는 것을 듣고 비엔나에서 개최되는 페스티벌에 참여하도록 주선했다. (1935년, 참가 단체 중 1위)


폰 트랩 가족이 노래하는 것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게 된 당시의 오스트리아 총리는 그들의 다시 비엔나로 초청하여 단독 공연을 하도록 했다.


1938년 독일에 의해 오스트리아가 병합되자 폰 트랩 패밀리는 나치 치하의 삶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다. 폰 트랩은 나치로부터 독일 해군으로 입대하라는 제안을 받고 있었고 히틀러의 생일 콘서트에 가족 합창단 공연을 요청도 거절하자 나치의 탄압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결국 폰 트랩은 가족의 안전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그 해 9월 이탈리아로 떠나는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이후 이들은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가는 긴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


결국 이들 가족은 1938년 12월 10일 뉴욕에서 첫 콘서트를 시작으로 미국 공연을 이어가던 중 미국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아래 신문은 뉴욕 타임스에 실리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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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간의 방문 비자 만료 후에 스칸디나비아 여행을 떠나 1939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이민국의 심사를 받기 위해 잠시 엘리스 섬에 억류되었다. 심사받을 당시 ‘얼마나 머물 생각이냐? 는 조사원의 심문에 ‘다시는 떠나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입국이 허락되었다.

1939년.jpg 1939년 네덜란드 공연
1940년.jpg 1940년
1947.jpg 1947년 순회공연 버스

1941년 폰 트랩 가족은 미국의 버몬트 주 스토우(Stowe, Vermont)에 정착하고 이듬해 660 에이커 농장을 매입하여 트랩 패밀리 로지(Trapp Family Lodge)로 만들었다.

Trapp_Family_Singers_1941.jpg 1941년 보스턴 공연

이들 가족은 1955년까지 세계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1965년 ‘사운드 오브 뮤직’이 영화화된 후 큰 성공을 거두자 50만 달러의 로열티를 받았다.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본 트랩 패밀리는 마리아가 합류하기 전에 이미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고, 본 트랩 남작 역시 가부장적이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음악 활동을 즐기는 온화한 마음씨의 부친이었다.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황열병으로 죽은 첫 아내였다. 첫 아내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했고 아이들에게 100곡 이상의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남편이 죽은 후 마리아는 한 친구에게서 가족의 얘기를 글로 써보라는 조언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글재주에 자신이 없는 그녀는 극구 거절했지만 친구의 간청이 계속되자 결국 펜을 들어 자신이 겪어온 지난 얘기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Maria_von_Trapp_in_1948.jpg 1948년 마리아

1949년 <트랩 패밀리 싱어 이야기,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가 필라델피아의 리핀콧 컴퍼니(J. B. Lippincott Company )에서 출판된 이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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