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국에 정착하다
영화의 내용과는 달리 본 트랩 패밀리는 마리아가 합류하기 전에 이미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고, 본 트랩 남작 역시 가부장적이고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 음악 활동을 즐기는 온화한 마음씨의 부친이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 사람은 마리아가 아니라 황열병으로 죽은 첫 아내였다. 첫 아내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했고 아이들에게 100곡 이상의 노래를 가르쳤다고 한다.
또 이들 가족이 오스트리아를 떠날 때 영화처럼 알프스 산을 걸어서 넘어가지 않았다. 출발할 때 이미 음악 공연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고, 잘츠부르크를 떠날 때는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기차를 타고 갔다.
이들의 첫 행선지는 이탈리아였는데, 영화의 내용처럼 잘츠부르크에서 스위스까지 걸어서 가기에는 불가능한 거리이며 국경을 접하고 있지도 않다. 만약 걸어서 갔다면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국경은 독일이다. (스위스 국경까지는 거의 300km 이상 떨어져 있다)
이들이 오스트리아를 떠난 다음날 국경이 봉쇄되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 이들 가족은 곧 이탈리아 국적 취득을 했는데 이는 본 트랩 남작의 실제 출생지가 이탈리아 영토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런던을 거쳐 뉴욕으로 갔다)
당시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으며 그녀의 실제 성격은 영화처럼 달콤한 성품이 아니었다. 자주 소리를 질렀고, 때로는 물건을 내던지며 문을 쾅 닫으며 화를 내는 일도 자주 있었지만 이내 화를 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리아는 본 트랩 패밀리 아이들 중 둘째 딸 게오르크의 가정교사였지 아이들 전체의 가정교사는 아니었다. 게오르크는 당시 성홍열을 앓아 4마일 거리의 학교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와 본 트랩 남작의 실제 결혼은 1927년 11월 26일이며 당시 마리아의 나이는 22세, 남작의 나이는 47세였다. (큰 아들 루퍼트와는 겨우 6살 차이)
1938년 오스트리아를 떠났으니 떠나기 전에 이미 11년째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촬영 당시 영화 속의 배우 크리스토머 플러머는 35세, 줄리 앤드루스는 28세였다)
본 트랩 남작과 마리아는 결혼 후에 세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딸 로스 마리는 1928년에, 엘레오노레는 1931년, 그리고 유럽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후 1939년 1월 필라델피아에서 아들 요하네스가 태어나 자녀수는 전부 10명이 되었다.
스토우에 정착한 후 온 가족이 힘을 모아 로지 운영에 치중했다. 순회공연을 하지 않을 때는 이곳에서 음악 캠프를 운영하기도 했다. (구글맵 von Trapp Family Lodge & Resort으로 검색)
https://www.vontrappresort.com/
1944년 마리아를 비롯한 이들 가족은 미국에 영원히 정착하기 위해 시민권 신청을 했지만 게오르그 본 트랩 남작은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
1980년 처음 운영하던 로지가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주변의 토지를 더 구입하고 2,500 에이커의 면적에 96실 규모의 리조트를 만들었다.
이곳 리조트에 있는 가족 공동묘지에 마리아(1905년 ~1987)와 본 트랩 남작(폐암으로 일찍 죽었다. 1880년~1947년)이 묻혀있다.
1947년 본 트랩 남작이 죽은 후 1949년 마리아의 회고록 형태인 원작 ‘트랩 패밀리 가수의 이야기’(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의 영화 판권은 1956년 독일의 제작자에게 9천 달러(현재 가치 85,000달러)에 팔려 독일에서 가장 먼저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2년 후 1959년 속편 ‘The Trapp Family in America’가 제작 발표되었고 이 두 개의 영화는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다.
1956년 파라마운트 사는 미국 내 영화 판권을 독일의 제작자에게 매입하여 오드리 헵번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취소하고 뮤지컬을 먼저 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59년 11월 16일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상영된 이 뮤지컬은 이후 대성공을 거두고 1443회 공연을 펼치며 6개의 토니상을 수상했다.
1961년 런던의 팰리스 극장에서 초연된 후 역시 대성공을 거두고 2,385회의 공연이 이어졌다. 이후 1981년 런던의 아폴로 빅토리아 극자에서 리바이벌되어 기네스북에 기록된 영국 뮤지컬 작품 중 단일 주(10월 26일부터 31일까지) 최고 관객 수를 기록했다.
1998년 브로드웨이에서 리바이벌 공연이 시작되어 1999년 533회 공연이 지속되었고 이후 미국 순회공연으로 이어졌다.
1960년 6월, 20세기 폭스는 뮤지컬의 영화 판권 구입에 125만 달러 외에 총수익의 10%를 추가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에 성공했다.
1962년 20세기 폭스의 회장은 작가 어니스트 리먼(Ernest Lehman)에게 영화 각본을 써 달라고 했다. 리먼은 뮤지컬에서 공연된 음악 중에서 'Do-Re-Mi'를 제외한 많은 곡들을 삭제하는 등 전편의 편집을 새롭게 각색했다.
1963년 1월 리먼은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 중의 한 사람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를 초대하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the Sound of Music> 뮤지컬을 보러 갔다. 공연을 본 와일러는 감독 제의를 거부했지만 리먼의 계속되는 간청에 하는 수 없이 감독직을 맡기로 결정했다.
당시 리먼은 뮤지컬을 연출했던 로버트 와이즈(Robert Wise)에게도 비밀리에 대본을 건네주고 감독 의향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이는 당시 윌리엄 와일러의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한 이유가 있었고, 또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를 성공적으로 연출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리먼의 제안대로 알프스의 초원에서 헬리콥터를 뛰워 공중촬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유튜브의 영상을 감상해 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JM83jboNe1s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 탈출 장면에서 배경으로 보이는 웅장한 산은 운터스베르크 산 (Mount Untersberg)이다.
그리고 마리아가 노래를 부르는 목초지는 오스트리아-독일 국경 근처 독일 바이에른(Bavaria) 주의 마르크트셸렌베르크(Marktschellenberg)에 위치한 개인 소유의 메흘베크 목초지 (Mehlweg Meadow)이다.
이곳을 찾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하다. 47.68824114891299, 13.064124263899467 아니면 Poschachlehen를 입력하고 주차한 후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인근에 있는 The Sound of Music Trail은 이곳에서 35km 거리에 있는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