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극에서 영화로
1899년, 연극 제작자인 마크 클라우(Marc Klaw), 에이브러햄 얼랭거(Abraham Erlanger)는 월리스를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월리스가 우려하는 바를 해소하기 위해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던 것이다.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배우가 직접 등장하지 않고, 무대 위를 비추는 '한 줄기 밝은 빛'으로 상징적인 표현을 하기로 했고, 전차 경주의 재현은 실제 말 8마리를 무대 위에 설치된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게 하고 배경 그림을 움직이는 특별한 장치를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드디어 1899년 11월 29일 뉴욕의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무대의 막을 올리게 되었다.
연극은 당대 최고의 히트작이 되어 돌풍을 일으켰다. 월리스의 각색은 완벽했으며 정교한 특수효과와 웅장한 스펙터클과 배경음악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연극을 본 월리스는 "My God. Did I set all of this in motion?"라고 했다.
매주 25,000명의 관객이 몰려들었고 1921년까지 공연이 계속되었으며 미국 전역은 물론 영국, 호주 등으로 순회하며 전체 관객수는 2천만 명이 넘었고 1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연극 무대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자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이 월리스에게 영화화 판권 계약을 위해 수없이 압박을 가했지만 월리스는 1905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월리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907년 칼렘 컴퍼니(Kalem Company)는 소설과 인기 있는 연극의 성공에 편승하여, 월리스 가문의 허락이나 출판사 및 연극 제작사의 승인 없이 15분짜리 무성 단편 영화를 제작했다.
월리스의 아들 헨리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칼렘 사를 고소했다.
이 소송은 결국 영화 제작자가 저작권이 있는 자료를 각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판례를 남기며, 영화 산업의 저작권법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11년 연방 대법원 판결)
월리스의 아들 역시 부친의 유업을 계승한다는 이유로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끈질긴 요청을 10년간이나 거부했지만 1915년 앨링거(Erlanger)와 60만 달러를 받고 계약했다.
이후 앨링거는 판권을 골드윈 스튜디오(Goldwyn studios, 곧 MGM이 됨)에 100만 달러와 수익 절반을 받는 조건으로 다시 매각했고, MGM은 1925년 첫 번째 공식 장편 무성 영화 《벤허》를 제작하게 되었다.
드디어 1925년판 영화 ‘벤허’가 선을 보였다. 비록 무성영화였지만 390만 달러가 투자된 이 영화는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최고 수익을 올리는 영화로 성공했다.
세월이 흘러 1950년대에 접어들자 미국의 각 가정에는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MGM은 곧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고 영화사가 소유하고 있던 영화관 체인을 매각해야만 했다.
그러나 1956년 MGM의 경쟁사였던 파라마운트 픽처스가 영화 <십계>를 크게 히트시키자 이에 자극을 받은 MGM은 자사의 대표적인 <벤허>를 리메이크하여 맞불을 놓기로 결정했다.
우선 1925년판 <벤허> 제작 당시 전차경주 장면의 조감독이었던 윌리엄 와일러를 감독으로 선정한 후 본격적인 영화 제작 검토에 착수하고 1957년 MGM 스튜디오의 수장 조셉 보겔(Joseph Vogel)은 이 사실을 언론에 발표하며 MGM의 운명을 걸었다고 했다.
하지만 시작부터가 난항이었다. 시드니 프랭클린이 감독을 맡고 벤허 역에 당시의 인기배우 말론 브란도, 스튜어트 그레인저와 로버트 테일러가 거론되기도 하는 등 MGM 자체 팀에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 샘 짐발리스트(Sam Zimbalist)는 윌리엄 와일러 감독을 끝까지 밀어주었고 이에 보답하듯 윌리엄 와일러는 예산 1,000만 달러를 약속받은 후 본격적인 각색에 돌입했다.
그리고 주연 유다 벤허 역에는 폴 뉴먼, 말론 브란도, 록 허드슨 등 여러 배우가 고려되었으나, 결국 당시 상대적으로 덜 유명했던 찰턴 헤스턴이 낙점되었다.
MGM은 무려 12명에 달하는 작가를 섭외하여 시나리오를 만들어갔다. 우선 1925년판 영화 <벤허>의 시나리오를 깡그리 무시하고 550페이지에 달하는 윌리스의 소설을 처음부터 새롭게 각색했다.
하지만 감독직을 제안받은 윌리엄 와일러는 처음 나온 시나리오를 보자 유치하다 ("very primitive, elementary")는 이유로 감독직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1958년 1월 3일 35만 달러, 박스 오피스의 8%(혹은 순이익의 3% 중 더 많은 액수)를 조건이라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대의 금액으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찰턴 헤스턴이 주역 ‘벤허’로 확정되기 전에 거론된 배우들 중에 버트 랭커스터는 대본이 지루하고 기독교를 경시한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했다.
그 외에 폴 뉴먼, 록 허드슨, 제프리 혼, 레슬리 닐슨 등도 거론되었지만 각가지 사유로 캐스팅되지 못했다. 하지만 메살라(Messala) 역으로는 수월하게 스티븐 보이드(Stephen Boyd)가 확정되었다.
하지만 사실 스티븐 보이드 이전에 거론된 배우가 있었다. 제안을 커크 더글라스는 벤허 역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것이다.
벤허의 양부이자 로마 제독 퀸투스 아리우스 (Quintus Arrius) 역할은 영국 배우 잭 호킨스 (Jack Hawkins)에게 돌아갔다. 이 무렵 윌리암 와일러는 로마인 역에 영국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독특한 전략을 세웠다.
이는 관객들이 악센트를 통해 로마인(영국식 영어 악센트)과 유대인(미국식 영어 악센트)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잭 호킨스는 이 전략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배우였다. 대신에 유대인들은 미국배우 위주로 캐스팅하기로 했다. 벤허의 애인이자 나중에 아내가 되는 에스더 (Esther) 역에는 이스라엘 출신 하야 하라릿 (Haya Harareet)이 캐스팅되었다.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 스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에 맞는 순수하고 강인한 이미지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벤허의 어머니 미리암 (Miriam) 역에는 마사 스콧 (Martha Scott)이 캐스팅되었고 여동생 역의 티르자 역에는 캐시 오도넬이 캐스팅되었다. 두 사람은 한 달 내내 문둥병자 분장을 하고 대기하며 촬영이 잠시 중단될 때 틈틈이 촬영하는 등 헌신적인 연기를 펼쳤다
벤허에게 전차와 말을 제공하는 아랍의 일리데림 족장 (Sheik Ilderim) 역에는 영국 배우 휴 그리피스 (Hugh Griffith) 맡았다. 그는 유쾌하고 개성 넘치는 역할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로마에서의 촬영을 위해 단역과 엑스트라 모집을 위한 캐스팅 오피스를 개설했다.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할 예상되는 인원은 5만 명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 중에 365명의 배우가 대사를 가진 배우였다.
이들 대부분은 전화나 고정 주소지가 없어 입소문을 통해 연락해야 했으며, 엄청난 수의 인원을 동원하는 데 며칠이 걸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