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가 월리스의 소설
남북 전쟁 당시 34살에 북군의 장군 소장으로 진급한 장군이었으며 의회 의원을 거쳐 뉴멕시코 주의 주지사로 재직할 당시 작가 월리스는 소설 <벤허>의 집필을 시작했다.
그는 1878년부터 1881년까지 주지사로 재직하며 산타페이에 있는 주지사 관저에서 소설의 마지막 장을 완성했다. 그리고 <벤허>가 출판된 후 1885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미국 공사 신분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오스만 제국에서 돌아온 후에도 그의 집필은 멈추지 않았다. 고향 인디애나폴리스의 블라허네에 7층짜리 아파트 건물을 지었고 크로퍼즈빌(Crawfordsville)에 머물며 <벤허>로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활발한 자선활동과 함께 자신만의 취미로 여가시간을 즐겼다.
1905년 공직에서 은퇴한 후 인디애나주 크로퍼즈빌에 있는 자택에서 남은 여생 동안 집필 활동에 전념했다. 1905년 2월 15일 사망할 당시에도 그는 자서전을 집필하고 있었으며 그의 자서전은 이듬해에 출간되었다.
월리스의 필생의 역작 <벤허>는 1880년 출간된 이래 1936년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출판되는 1936년까지 거의 50여 년의 세월 동안 미국의 역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그 전의 베스트셀러는 1852년 출간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다)
월리스는 1876년 9월 19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 전쟁 북군 참전 용사들의 제3회 전국 재향군인회'에 참석하기 위해 크로퍼즈빌을 떠나 기차를 타고 가던 중 로버트 잉거솔 대령(Colonel Robert G. Ingersoll)을 우연하게 만나 합석하게 되었다.
잉거솔 대령은 무신론자였는데 당시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종교적 신념이 거의 없었던 월리스는 잉거솔과의 토론 중에 잉거솔이 성경, 신, 천국,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자 자신은 제대로 대응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월리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진실성에 대해 깊이 파고들고자 연구를 시작하고 잉거솔이 주장했던 논리에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찾기 위해 광범위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많은 도서를 보유하고 있던 워싱턴 D.C. 의회 도서관을 수시로 방문하여 고대 로마의 역사, 유대인의 역사, 그리고 신약성경 시대의 중동 지역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그의 이 연구는 소설 <벤허>를 집필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연구가 계속될수록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 갈수록 매료되었고 그의 연구 자료는 부제 '그리스도의 이야기(A Tale of the Christ)'를 달아 소설 <벤허>가 차츰 완성되어 갔다.
결국 그는 자신의 소설을 완성하는 과정이 그의 신앙에 대한 여정의 결과물이 되었고 결국 그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그리스도의 신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비록 허구의 인물이었지만 주인공 유다 벤허(Judah Ben-Her)의 존재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영향을 받아 부당하게 투옥된 후 탈출하고 복수를 꾀하다가 결국 구원을 얻는다는 서사를 완료했다.
또한 월리스는 자신이 사단장으로 참여한 남북전쟁 당 그랜트 장군과 벌였던 경마에서 자신이 이겼던 경험을 벤허의 전차경주로 녹여내기도 했다.
그리고 벤허를 배신하는 메살라(Messala)는 허구의 인물이기는 하나 로마 제국의 오만함과 유대 문화에 대한 경멸을 상징하며 벤허와 대응되는 악인으로 창조되었다.
또한 미리암(Miriam)과 티르자(Tirzah)는 월리스 자신의 아내 저렐다(Zerelda)의 헌신적인 자세 즉, 남편의 글쓰기를 끝까지 지지해 주던 모습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얘기가 있다.
마지막으로 벤허의 양아버지 로마 함대 사령관 퀸투스 아리우스(Quintus Arrius)는 역시 허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는 동명의 로마 정치인의 이름을 빌려 왔으며 명예와 규율을 중시하는 전형적인 로마 귀족의 모습을 투영했다.
비록 유다 벤허가 유대인이었지만 그는 아리우스 제독의 목숨을 구했으며 또 당시 로마인들은 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보상하는 것이 명예로운 행위로 여겨졌고, 로마 사회에서 보편적이었던 양자 입양으로 후계자를 양성하여 가문을 잇게 하는 것으로 유대인이라는 신분 제약을 탈피할 수 있었다.
1880년 소설의 출간 후 수많은 제작자들이 월리스에게 연극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제안을 했지만 월리스는 요지부동 이들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역을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소설의 내용에 등장하는 대규모의 해상 전투신과 전차 경주 장면을 무대 위에 현실감 있게 구현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의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