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연에서 주연이 된 킬러
1967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가 있다.
알랭 들롱(Alain Delon), 나탈리 들롱(Nathalie Delon)이 출연하고 장 피에르 멜빌(Jean-Pierre Melville)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사무라이, Le Samouraï >라는 영화이다.
프랑스는 물론 한국에서도 크게 인기를 얻은 이 영화는 알랭 들롱에게 '트렌치코트와 중절모를 쓴 도시의 고독한 킬러'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비록 프랑스 감독이 어떤 이유로 제목을 '사무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의 내용은 일본의 어떠한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단지 주인공 알랭 들롱에게 '사무라이보다 고독한 자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정글의 호랑이 정도일 것이다.'라는 이미지를 씌우고 싶은 멜빌 감독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 영화는 후대의 영화감독들에게 많은 주었다. 아래의 영화들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들이 모두 인정한 사실이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
오우삼의 <영웅본색>, <첩혈쌍웅>
마이클 만의 <히트>
마틴 스코세이지의 <택시 드라이버>
프랜시스 코플라의 <대부>
뤽 베송의 <레옹>... 등
1959년생인 프랑스의 후배 감독 뤽 베송(Luc Paul Maurice Besson)이 1967년에 개봉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매운 어린 나이였다. 하지만 감독이 자인했듯이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고독한 킬러'의 모습은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알랭 들롱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다.
뤽 베송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한 영화는 <그랑블루, 1988>였지만 그를 세계적인 감독의 반열에 올린 영화는 바로 '고독한 킬러'가 등장하는 후속작 <니키타, 1990>와 <레옹, 1994년>이었다.
코미디 같은 사실이 하나 있다. <사무라이>의 미국 개봉은 1972년 7월 12일이었다. 이는 1972년 3월 개봉된 프랜시스 코플라의 <대부>가 개봉된 후 부랴부랴 영어 더빙으로 개봉되었다.
프랜시스 코플라가 기존의 미국 갱스터들을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말수 적은 신사'의 모습으로 등장시킨 사실이 <사무라이>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전해진 탓이다. 그래서 영화 제목도 '사무라이'가 아닌 <The Godson>으로 바꾸어 개봉했다.
하지만 뤽 베송이 세상에 처음으로 선보인 '고독한 킬러'는 중절모를 쓴 남자가 아니라 고독하고 또 약간은 천진난만하고 연약하게 보이는 여자 '니키타(NIKITA)였다.
뒷골목의 불량소녀가 정부기관에 의해 전문 킬로로 재탄생하는 '니키타'의 모습은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킬러의 세계를 반전시킨 뤽 베송의 창작품이었다.
영화 <그랑블루>가 빅히트를 칠 무렵 한창 열애에 빠져 결혼까지 한 그의 연인 안 파리요(Anne Parillaud)에서 느꼈던 수줍음이 많지만 지적이고 신비로운 모습에서,
- 그가 이렇게 느낀 것은 열애 당시 안 파리요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 애를 태웠다고 한다. 이런 모습에서 뤽 베송은 '혹시 그녀가 이중생활을 하는 킬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한다.
결국 뤽 베송은 자신의 연인 안 파리요를 니키타로 변신시켜 영화에서 자신이 느낀 그녀의 모습 그대로 '고독하고, 신비롭고, 이중생활을 하는 킬러'로 등장시켰던 것이다.
뤽 베송은 초보 킬러 '니키타'의 단점을 메워주는 또 다른 킬러를 짧지만 강렬하게 영화에 등장시켰다. 니키타의 살인 현장을 청소하고 잔인하게 적들을 제압하는 무자비한 인물 '빅터(장 르노 분)'는 그야말로 냉정하고, 효율적이고, 감정이 없는 완벽한 킬러의 모습이었다.
'빅터'는 특유의 건장한 체격과 함께 무뚝뚝한 표정, 말없이 행동으로만 보여주는 잔인함과 어울리지 않게 짙은 선글라스와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한 차갑지만 니키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의로운 남자였다.
두 개의 영화 <그랑블루>와 <니키타>가 잇따라 성공하자 뤽 베송은 가장 큰 영화 시장 미국으로 진출하고 싶었다.
하지만 야심차게 준비하던 할리우드 영화 대작 <제5원소>가 여러 가지 문제로 제작이 미루어지자 기존 제작팀은 당시 의외로 인기를 얻고 있던 장 르노 <Jean Reno>를 주연으로 하는 영화를 급작스럽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제작자들이 선뜻 그의 영화에 투자하기를 꺼리자 그는 프랑스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엉뚱하지만 잔인하게 적을 제거하는 고독한 킬러'의 영화 <레옹>을 탄생시켰다.
영화 <레옹>은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거칠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고 더군다나 영화에 등장시킨 어린 소녀 '마틸다(Mathilda, 나탈리 포트만 분)'는 순수성과 상실을 대비시키는 기막힌 신의 한 수였다.
마틸다에 니키타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어린 니키타의 모습이라고 착각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