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포스티노>의 숨겨진 이야기

2. 천재 배우의 영혼이 담긴 영화

by 발길 가는대로

판권을 확보한 마시모 트로이시는 자신의 구상을 담은 시놉시스를 자신이 좋아하는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마이클 래드포드 (Michael James Radford)에게 건네주며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마시모 트로이시.jpg 1989년 마시모 트로이시

하지만 래드포드 감독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실망한 트로이시는 여자 친구이자 각본가로 이름을 날리던 안나 파비냐노(Anna Pavignano)와 함께 대본 수정 작업을 시작했고 곧이어 래드포드 감독도 이 작업에 참여했다.

트로이시와 파비냐노.jpg

우선 작품 전체의 배경부터 수정되었다. 칠레에서 1950년대 이탈리아로 변경하고 주인공 마리오의 캐릭터도 10대 어부에서 40세 노총각 우체부로 바꾸었다.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 이탈리아로 바꾸다 보니 네루다 역시 이탈리아에 거주하는 것으로 변경해야만 했다.


대본을 수정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트로이시의 건강 문제였다. 어린 시절부터 류머티즘으로 인한 심장병을 앓고 있던 트로이시가 너무 쇠약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1시간 정도만 겨우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우체부 마리오의 안색이나 어눌한 대사 처리가 전부 연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트로이시의 건강은 영화를 제작하는 투자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그의 건강을 우려한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려했기 때문에 영화의 전체 제작비는 독립 영화 수준보다 조금 나은 300만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다.


지구상에서 국토의 모양이 가장 이상하게 생긴 나라는 단연코 남미의 칠레이다. 남북 길이가 4,300km인데 반해 동서의 평균 거리는 180km 정도이기 때문이다.


무려 300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칠레는 1844년에야 정식으로 독립국 지위를 회복했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유럽의 이민자들이 남미로 몰려들고 있었지만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유럽 이민자들의 최후 정착지가 되었다.


19세기에 도착한 이민자들 중에서 3만여 명에 달하는 독일계 이민자들과 6만여 명에 달하는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이 칠레의 사회와 문화를 바꾸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의 칠레는 1920년대에 생성된 마르크스주의 단체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10여 년 동안 10여 개의 정부가 탄생할 정도로 불안정한 시기를 겪었고, 그 이후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독재정부 혹은 급진당이 집권하는 연립정부가 정권을 이끌었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년)는 칠레가 낳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공산주의자였다.


네루다의 부친은 철도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사망한 학교 교사였다. 13살 무렵부터 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던 그는 20세 무렵에는 초현실주의 시, 역사 서사시, 정치 선언문, 산문 자서전, 시집 ‘20편의 사랑 시’와 ‘절망의 노래’ 등 다양한 문체의 글로 '천재 작가'라는 명성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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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부친은 네루다가 시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1920년 중반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필명을 채택해야만 했다.


1921년 16세의 네루다는 교사가 되기 위해 산티아고로 이주한 후, 칠레 국립대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시를 공부하는데 열중했다.


그의 첫 시집 ‘황혼의 책(Crepusculario)’이 1923년 출간되고 이어서 다음 해 1924년에 ‘20편의 사랑의 시’와 ‘절망의 노래’등이 발간되어 에로틱한 내용으로 논란이 되었지만 모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수십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명성이 국외로 뻗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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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에 실린 시 '스무 개의 사랑의 시'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면,


여자의 몸, 하얀 구릉, 하얀 허벅지, 너를 내어주는 모습은 꼭 이 세상을 빼어 닮았구나.

우악스러운 농사꾼 내 몸뚱이는 너를 파헤쳐 대지의 밑바닥에서 아들놈이 튀어나오게 한다.

터널처럼 나는 홀로였다. 새들은 내게서 도망쳤고 밤은 엄청난 침략으로 내게 쳐들어왔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너를 벼리었다 무기처럼, 내 활에 재어진 화살처럼, 내 투석기의 돌멩이처럼.

그러나 복수의 시간은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

가죽의, 이끼의 갈증 나고 단단한 젖의 몸.

아 젖가슴의 사발들! 아 넋 나간 눈동자! 아 음부의 장미들! 아 너의 느릿한 슬픈 음성!

내 여인의 몸이여, 나는 네가 상냥하길 고집하리라.

나의 목마름, 끝없는 나의 번민, 막막한 나의 행로여!

영원한 목마름이 계속되는 어두운 수로들, 끊이지 않는 피로, 그리고 한없는 고통.


네루다의 시집은 출간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스페인어로 가장 많이 팔린 시집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20세의 그는 여전히 가난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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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적 절박함으로 인해 그는 정부에서 제안한 영국의 식민지 버마의 수도 랑군에서 명예 영사직을 맡았고 뉴델리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외에서의 생활은 그를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외로움으로 몰아넣어 한 곳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실론의 콜롬보, 자바의 바타비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떠돌며 생활했다.


1950년 “United Fruit Company,”라는 시를 발표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영토와 교통망을 통제하던 서구 기업들의 착취와 피해를 저항했다.


그리고 마드리드 주재 영사로 근무하며 겪었던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공산주의에 심취하고 반 파시즘의 시를 주로 발표했다. 그의 이러한 시는 시간이 갈수록 칠레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그는 칠레의 국민 시인으로 추앙되었다.


그는 시를 통해 다국적 기업이 자신의 땅과 생활 방식을 파괴하고 또 라틴 아메리카의 민중들이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 얘기하고 부를 축적하는 기업을 ‘피에 굶주린 파리’라고 불렀다.


스페인 내전을 몸소 체험했던 네루다는 동시대의 많은 좌파 지식인들처럼 소련의 스탈린 숭배자가 되었다. 당시의 소련이 나치 독일을 물리치고 레닌이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이상주의적인 교리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1948년, 상원의원이던 그는 정부의 탄압을 받자 지하세계로 숨어들어 무려 13개월 동안 東家食西家宿하며 지내다가, 1949년 3월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네루다는 과테말라 대사관의 직원의 도움으로 친구의 여권으로 유럽으로 탈출했다. 그 후 그는 무려 3년 동안 파리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도시는 물론 인도, 중국, 스리랑카, 소련을 여행했다.


1952년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에드윈 세리오(Edwin Cerio)가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초대했는데, 이 별장에서의 생활은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1994)의 가상의 무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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