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포스티노>의 숨겨진 이야기

4. 소설과 영화 속의 네루다

by 발길 가는대로

소설 속의 네루다는 1969년부터 사망한 1973년까지 칠레의 해변 마을 이슬라 네그라의 소박한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 속의 네루다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네루다가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섬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70년 66세의 네루다는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으나 좌파연합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양보하여 남미 최초의 좌파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는데 공헌하였고, 프랑스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다.


파리 주재 외교관 시절이던 197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명성을 높였지만 전립선 암이 발견되어 어쩔 수 없이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왔다. 치료를 받던 중에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아옌데가 죽고 정권이 전복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네루다를 지지하는 진영에서 시위를 선동할 것을 두려워해 네루다의 집을 철두철미하게 봉쇄했다. 그 사이에 네루다의 병세는 악화되어 산티아고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9월 23일 사망하고 말았다.


장례식은 군인들의 철통 같은 보호(?) 아래 치러졌지만, 훗날 1990년 피노체트가 물러간 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의 독살설이 유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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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시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그는 ‘사랑의 시인’, ‘자연의 시인’, ‘민중의 시인’, ‘전위주의 시인’ 등의 다양한 평가를 받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그의 모습은 단연코 ‘민중의 시인’이며 ‘제3세계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이었다.


1948년 상원의원으로 재직 시에 국회에서 당시의 칠레 대통령 곤잘레스 비델라(Gonzalez Videla)를 탄핵하는 연설을 한 후 1년여의 도망자 신세에서 벗어나 해외로 망명하여 이탈리아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민중시인으로서의 명성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칠레 정부와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자 좌파 시인인 그의 망명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이탈리아 민중들의 시위로 인해 결국에는 정착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화나 소설 속의 마리오가 네루다와의 만남을 통해 점점 시인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네루다에게 동화되어 의식화되어 가는 과정도 보여주고 있다.


군부의 쿠데타로 평생의 정치적 동지 살바도르 아옌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네루다는 갑자기 기력을 잃어갔다. 병세가 악화되자 네루다는 침대에 누워 쿠데타를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부인에게 구술로 받아 적게 하면서 회고록을 마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무장한 군인들이 가택 수색을 하러 왔고 네루다는 인솔하는 장교에게 ‘자기 집에서 위험한 것이라고는 시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병상에서 죽어가면서까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은 “사람들을 총살하고 있어, 사람들을 총살하고 있어”라고 되뇌었다.


그의 죽음 이후 그의 집은 우파 과격분자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었고 서슬 퍼런 군인들의 총칼로 인해 조문행위조차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의 유해는 산티아고의 평범한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단출한 행렬의 시신 운구였지만, 네루다의 유해가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었고, 인산인해를 이룬 군중 속에서 “네루다”라는 단말마의 비장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네루다를 외치며 함성을 높였다.


당황한 군인들은 운구 행렬을 독촉하고 군중들은 일제히 인터내셔널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노랫소리는 시대의 아픔이자 통곡이 되어 이후 17년간의 기나긴 민주화 운동의 첫 횃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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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5년의 세월이 흐른 후 네루다가 이탈리아의 섬으로 마리오를 찾으러 왔다. 네루다 부부가 베아트리체의 주점으로 들어섰을 때 한 작은 사내아이 “파블리토”가 두 사람과 시선을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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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는 네루다에게 마리오는 자신이 출산을 앞둔 며칠 전에 나폴리에서 벌어진 대규모 군중집회에 참석했다가 군중들에게 깔려 죽었다고 말한다.


소설 속 마리오의 죽음은 이와 달랐다. 잡지사의 시 공모전에 시를 보낸 마리오는 피노체트 정권의 희생양이 되는 것으로 스토리가 막을 내리는 것이다.


영화 속의 첫 장면, 몇 척의 소형 어선에서 생선 바구니를 옮기던 장면의 촬영은 Area Balneare di Pollara(주소: Via Massimo Troisi, 98050 Malfa ME, 이탈리아)에서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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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 나오는 베아트리체의 술집은 나폴리 해안의 작은 섬에 있는 해산물 전문 식당 La Locanda del Postino에서 촬영했다. 현재의 모습이다. 식당 안에는 영화 촬영 당시의 모습과 마리오가 타고 다니던 자전거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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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우체국으로 나오던 장면은 베아트리체의 술집에서 가까운 골목에 있다. 아래 캡처 사진은 구글맵에서 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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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네루다가 살던 집은 시칠리아 북쪽에 있는 작은 섬 살리나(Salina)의 외딴섬에서 촬영했다. 구글맵에서 Casa di Neruda nel film "Il Postino"로 검색하면 나온다. 아래 구글맵 캡처 사진에서 보다시피 아주 외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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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모습은 관리가 되지 않아 폐가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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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엔딩 장면을 포함하여 네루다와 마리오가 얘기를 나누던 해변은 프로치다(Procida) 섬의 Pozzo Vecchio beach, 혹은 Spiaggia Cala del Pozzo Vecchio로 검색하면 나오는 곳이다. 베아트리체의 주점과 섬 반대편인 서쪽 해안가에 있다.


프로치다 섬에는 영화 속의 신부님, 마리오와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이 나오는 교회, 그리고 마리오가 파블로 네루다가 섬 도착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는 영화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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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오가 영화 도입부에서 자전거를 타고 네루다의 집으로 가는 섬의 외길은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사이의 지중해 바다에 있는 작은 섬 판타렐리아(Pantelleria)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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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부 마리오 역을 맡은 배우는 마시모 트로이시(Massimo Troisi)이다. 그는 영화 촬영을 마치고 후편 작업 중에 죽었다. 그의 죽음은 마치 영화 속 마리오의 죽음과 닮아 있다.


당시 나이 41세였던 그의 죽음은 촬영을 마친 12시간 만에 발생한 급성 심장마비였다. 촬영 중에도 심장의 이상을 느꼈으나 영화의 완성을 위해 수술을 연기해야만 했다. 영화의 각본까지 그의 몫이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사후에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다.


마이클 래드포드 감독으로부터 각본을 의뢰받은 트로이시는 자신이 주연을 맡기 위해 원작의 무대를 이탈리아로 바꾸고 마리오 역할은 10대의 어부에서 40세의 우체부로 바꾸었던 것이다.


그의 건강을 고려하여 촬영 장소 역시 시칠리아 섬과 나폴리 위주로 진행되었고 혹시 모를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제작 초기에 모든 대사를 녹음해야만 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찬사와 호평이 이어졌다. 이탈리아에서 800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리고 미국과 캐나다 북미 시장에서 2,185만 달러의 수익을 올려 당시로서는 역대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비영어권 영화가 되었다.


1996년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르헨티나의 음악가 루이스 엔리케스 바칼로프가 음악상을 수상하고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등은 후보에 올랐다.


참! 프로치다 섬은 1999년 영화 리플리(The Talented Mr. Ripley,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 리메이커 영화)에서 맷 데이먼과 기네스 펠트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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