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기극의 희생양
로렌스가 사막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 1917년 12월 카이로에서 출발한 영국군은 팔레스타인 남부를 지나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었다.
1917년 11월 20일, 로렌스가 다마스쿠스(Damascus)로 이동하기 전에 전략적 철도 요충지 다라(Dara)를 염탐하던 중에 오스만 군대에게 체포된 적이 있었다. 모진 고문을 겪고 탈출에 성공한 로렌스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갈수록 무자비한 독종이 되어갔던 것이다.
로렌스가 겪은 고문 중에는 성폭행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로렌스의 언급은 “그날 밤 다라에서 내 진실성의 성 정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지고 말았다.”("In Dera'a that night the citadel of my integrity had been irrevocably lost.") 정도로 설명했던 것이다.
포로에서 풀려난 로렌스는 영화에서 오스만 제국의 포로를 잡지 말 것을 명령하거나 너무 심하게 부상을 입은 적군들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만류하기도 했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무기가 부족해 손에 들 수 있는 것이 돌멩이뿐이었지만 열차를 공격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로렌스의 트라우마는 무리한 행군에도 불구하고 다마스쿠스에 먼저 도달할 수 있는 있었던 이유는 아랍인들에 대한 영국 정부의 죄책감과 비밀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절박함을 담은 것이었다.
현재 시리아 남부 요르단의 국경 마을인 다라는 인구 75,000명의 작은 도시이며 이 중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6천 명을 차지하고 있고 국외 거주자의 비율도 65%에 달하고 있다.
다라에서 요르단 국경을 건너 50km 남쪽 지역에 있는 자타리(Zaatari)에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8만여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가 자리 잡고 있다.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아라비아의 로렌스 이후 벌어졌던 아랍의 모래사막에 마구 그어진 지도의 선은 오늘날까지 중동 지역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산 증거이다.
자라티에서 남쪽으로 100km 지점에 있는 아즈락 요새(Al Azraq Castle)는 지금도 높이 18m에 달하는 돌이 유령처럼 쌓여 있다.
인근의 오아시스로 인해 고대부터 전략적 가치를 지녔던 이곳은 로마인들이 요새로 만들었고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는 동안에는 로렌스가 포로 생활로 수척해진 몸을 요양하며 사막의 본부로 만들었던 곳이기에 지금도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다.
로렌스의 사무실은 아래 사진의 돌문 위의 방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머물던 로렌스는 “아즈락은 우리에게 아주 유리한 곳이었다.
겨울이 아무리 심하게 추위를 가져다주었지만 요새에 있던 우리는 얼마든지 오래 거주할 수 있었다.”라고 했다. 현재 이곳은 “Lawrence room”으로 불리고 있다.
2천 년의 역사를 가진 돌 요새 아즈락은 1927년의 지진으로 인해 위층이 무너지긴 했지만, 천정이 낮고 시원한 돌바닥과 좁은 창문을 통해 주변 사막을 내려다볼 수 있는 “로렌스의 방” 하나로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한 곳이다.
아래 지도는 아즈락, 자라티, 다라, 다마스쿠스를 잇는 구글맵이다.
1918년 9월 19일 새벽 로렌스는 자신을 얼마 되지 않는 병력을 이끌고 자신이 갇혀 있었던 다라를 공격했다. 9월 27일까지 계속된 공격은 오스만 제국의 군인들 외에 독일군 포로 250명을 확보하는 승리였다.
로렌스의 다음 목표는 다마스쿠스 점령이었다. 다마스쿠스로 향하기 전에 로렌스는 파이잘 왕자를 필두로 아랍 임시 정부를 수립하여 다마스쿠스에 임시 수도를 건설하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이틀 후에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새로운 아랍국 사령관 알렌비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프랑스 정부가 가로채고 말았다.
영화와 달리 로렌스는 다마스쿠스 점령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도시가 함락된 지 몇 시간 후 1918년 10월 1일 오전 9시경에 도착했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1919년 9월 미국 언론인 로웰 토머스(Lowell Thomas)와 인터뷰 중에 그의 사진작가 해리 A. 체이스(Harry A. Chase)가 런던에서 찍은 것이다.
토머스는 1919년 런던에서 '팔레스타인의 알렌비와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멀티미디어 쇼를 진행했는데, 대중의 큰 인기를 얻어 로렌스의 이미지를 위해 추가로 촬영된 사진이다.
도시를 점령하는데 선두에 섰던 병력은 올든 소령이 이끌던 영국의 제10 기병 연대였다. 하지만 이들 병력은 마리아노 고벳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이 진군하면서 로렌스와 파이잘이 기대했던 아랍 제국의 건설은 사라지고 말았다.
아래 사진은 1918년 10월 2일, 다마스쿠스에 입성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헨리 쇼벨(Henry Chauvel's) 장군 휘하의 제9 기병 연대 소속의 인도인 병력의 모습이다.
로렌스는 힘이 닿는 한 여러 사람들에게 아랍의 독립이 궁극적으로 영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설득하려고 했지만 영국 정부는 로렌스에게 대령이라는 승진과 함께 귀국 명령을 내렸다.
그렇지만 로렌스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1919년 1월, 영국의 시온주의 연맹의 수장 차임 바이즈만과 파이잘 왕자 간의 만남을 주선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협정을 체결하도록 도왔던 것이다.
파이잘은 바이즈만이 요구한 시리아의 시오니스트에 대한 지원의 대가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증가를 지원하다는 약속으로 미래의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조약은 프랑스에 의해 곧바로 무산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로렌스는 영국 외무부 소속이었지만 파이잘 왕자의 대표단 일원이 되어 1919년 1월부터 5월까지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다.
아래 사진은 1919년 1월 22일 촬영된 사진이다.
좌 1 루스탐(레바논 출신의 정치가), 좌 2 누리 알 사이드(훗날 이라크의 총리가 됨), 파이잘 1세(중앙, 훗날 시리아의 왕을 거쳐 이라크의 초대 국왕), 대위 피사니(파이잘 뒤, 프랑스 고문), 로렌스(파이잘의 고문 및 연락 장교), 하산 카드니 대위
영국 군인 신분으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했던 로렌스의 존재는 언론을 타고 현지에서 이미 유명인사로 소개되고 있었다.
그가 1919년 5월 17일 이집트 카이로행 비행기가 로마 센토셀 공항에 불시착하여 로렌스가 견갑골과 갈비뼈 두 개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이탈리아의 빅토로 엠마누엘 3세 국왕의 병문안을 받았을 정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아랍을 정복했던 영국의 사령관 앨런비는 강연, 춤, 음악이 포함된 수많은 무대에서 주연을 맡았고 이러한 무대 공연에는 영국의 국왕을 비롯한 귀족들이 참관할 정도였다.
이러한 무대에서 어쩔 수 없이 조연을 맡은 로렌스는 카메라의 요청에 의해 신비한 아랍의 베두인 복장을 하고 나타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로렌스는 때로는 관점을 달리하는 언론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가 거둔 위대한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는데 방해가 되는 악의 세력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가 파리평화회의의 결말을 보기도 전에 쫓겨났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로렌스의 대중적인 인기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1919년 3월, 아랍에서 로렌스와 동행했던 미국의 저널리스트 로웰 토마스가 뉴욕에서 “로렌스의 기행문”이라는 제목으로 멀티미디어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주는) 형식으로 뉴욕의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동영상은 앨런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 위주로 구성되었지만 베두인 복장을 하고 있는 로렌스의 인기가 날로 치솟았다. 따라서 원래의 제목 ‘팔레스타인의 앨런비와 함께’가 나중에는 ‘팔레스타인의 앨런비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로 바뀌었다.
아래 사진과 같이 1918년 로렌스의 자연스러운 모습도 로웰 토마스와 함께하며 찍은 사진이다. 첨부로 앨런비 장군의 예루살렘 입성을 촬영한 유튜브 영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BoZUrenL1Bc
여름이 되자 공연은 영국의 런던으로 옮겨져 무려 6개월간 인기를 끌었다. 이후 10년 동안 시드니, 오클랜드, 뭄바이, 오타와 등의 도시로 옮겨가며 1928년까지 공연이 이어지며 무려 4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토마스의 이야기를 듣고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관한 전설에 심취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이 철조망 위에 드리운 시체와 기관총 사격, 대규모 폭격으로 엉망이 되었던 젊은이들의 끔찍한 이미지 대신에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기병대의 모습과 흰색 아랍 전통 의상을 입은 현대적인 기사 모습의 로렌스가 사막을 질주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아래와 같은 로웰 토마스의 여행기 홍보 포스트는 영국의 이집트 주둔 사령관 에드먼드 앨런비 (Edmund Allenby) 장군과 로렌스의 업적을 기념하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었다.
1918년 2월 27일, 로웰 토마스와 그의 카메라맨 헨리 체이스는 예루살렘의 영국군 총독인 로널드 스토어스 대령의 사무실에서 로렌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의 첫인상과 만남에 대해 토마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7년을 보낸 후에도 청동으로 만들기에도 너무 하얀 피부를 갖고 있었다. 옥스퍼드 대학 특유의 조용한 말솜씨, 그리고 매우 겸손한 말투지만 그는 맨발을 하고 아랍 전사의 복장을 하고 돌아다녔다.”
한 달 후 3월 27일, 앨런비 장군의 허락하에 로웰 토마스는 로렌스의 안내로 요르단의 남부 아카바에서 아랍의 지도자 파이잘 왕자를 만났다.
전쟁이 끝난 후 뉴욕으로 돌아온 토마스와 체이스는 1919년 2월의 대부분을 여행에서 담아왔던 영상과 스틸 사진을 정리하는데 열중했다.
3월 17일부터 그가 준비한 무대는 5주 동안 1,200석의 극장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화면으로 보는 신비한 동양의 사막 모습과 낙타를 타고 있는 영국인 로렌스의 모습은 미국인들을 환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영국에서의 상영은 1919년 8월 14일,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개막되었다. 그리고 이 2시간짜리 공연은 6개월간 객석을 채우며 이어졌다.
1920년 2월부터 로렌스는 윈스턴 처칠 직속의 식민지 고문 사무소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사무실에 갇혀 있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틈만 나면 중동 지역을 여행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이 직접 사진을 찍어 여러 신문사에 아랍의 동정에 대해 기고했고 이러한 그의 기사는 더 타임스, 옵서버, 데일리 매일, 데일리 익스프레스 등의 신문에서 처칠의 중동 전략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1921년 3월 예루살렘에서 찍은 것으로,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과 압둘라 1세(Abdullah I) 등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카이로 회의 중 한 장면이다.
사진 중앙에는 영국 식민지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서 있고, 그의 왼쪽(사진 오른쪽)이 압둘라 1세이다. 이 회의의 결과로 이라크와 트랜스요르단의 국경이 확정되었으며, 압둘라 1세는 트랜스요르단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로렌스의 이러한 노력은 윈스턴 처칠이 아랍의 제국을 분할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21년 카이로 회의를 통해 다마스쿠스에서 쫓겨났던 파이잘은 영국이 통치하던 이라크에 자리를 잡았고 파이잘의 동생 압둘라는 요르단에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물론 이로 인해 통일된 아랍 제국이라는 개념은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영국 문화보호협회(National Trust) 소유로 되어 있는 로렌스의 거주지 클라우드 힐(Clouds Hill)은 영국 남서부의 county of Dorset 의 와렘(Wareham) 근처의 외딴 오두막이다.
19세기 초 로덴드론 덤불로 둘러싸인 숲의 작은 2층 오두막 집인 이곳은 색이 칠해진 벽돌과 기와지붕으로 지어진 곳이다. 로렌스는 1923년부터 1.8km 인근에 있는 보딩턴 캠프(Bovington Camp)에 출근하면서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의 거실에는 단열을 위해 로렌스는 단열을 위해 식당에 알루미늄 호일로 덮은 석면을 깔아 두었고 음식은 유리 돔 아래에 보관했다.
부엌과 화장실이 없는 이 오두막집은 책과 음악 그리고 욕조로 가기 위해 연결된 목조 계단이 있었고 바닥의 가장 평평한 곳은 보딩턴 캠프에서 가져온 침낭이 침대를 대신하고 있었다.
1921년 영국군에 재입대한 로렌스는 이후 14년 동안 영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군 기지에서 복무를 했다. 1929년 보딩컨 캠프에 다시 근무하게 되자 임대했던 이곳 롯지를 구입하게 되었고 인근 주민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는 외로운 사람으로 지냈다.
오늘날에는 PTSD로 알려졌지만 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오랜 친구들 몇몇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고 1935년 지난 20년간을 보냈던 군에서 제대하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느껴야만 했다.
1935년 5월 6일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현재로서는 당황할 뿐입니다. 나뭇잎이 나무에서 떨어진 후 죽을 때까지 이런 감정을 느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태가 계속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쓴 일주일 후에 클라우드 힐 근처에서 모터사이클을 타다가 사고를 당하고 1935년 5월 19일 보빙턴 캠프의 병원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상속자인 동생은 클라우드 힐을 영국 문화보호협회에 기증했고 이후 이곳은 로렌스의 유품, 가구와 모든 소유물 대부분을 그대로 둔 채 로렌스를 기념하는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로렌스의 흔적은 보빙턴 캠프의 전차 박물관과 모턴에 있는 세인트 니콜라스 교회의 마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로렌스의 침낭은 영화가 개봉된 1965년 어떤 방문객에 의해 도난당하고 말았지만 2001년 벨기에에서 익명으로 반환되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로렌스의 장례식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