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망국의 설움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된 헝가리 제국은 국토의 75%를 인근의 국가들 -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등의 나라들의 침략을 받았던 것이다. 국토만 줄어든 것이 아니라 한 때 140만 명 이상이나 되던 군인들이 졸지에 무장해제를 당하자 거리에는 실업자들이 넘쳐흘렀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이 닥치자 헝가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사회 전반에 빈곤이 만연하고 모든 사람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고 이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할 정도였다.
대공황에서 벗어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려는 열망으로 헝가리가 선택한 길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과의 친선으로 경제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나치 독일과 가까워지자 독일의 영향으로 1938년 이후 광범위한 반유대주의 법률이 제정되었고 사회 전반에 유대인 박해가 일상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헝가리는 자연스럽게 독일 편이 되었지만 헝가리가 이탈을 시도하자 독일은 헝가리를 침공하였고 이어서 헝가리 내의 6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44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으며 이들 대부분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라울 구스타프 월렌버그(Raoul Gustaf Wallenberg 1912-1947) 유대인 혈통의 스웨덴 출신이었다. 본래 외교관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그는 미국과 스웨덴 정부가 헝가리 내의 유대인들의 구조를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를 스웨덴 외무부가 파견하는 부다페스트 주재 공사관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자신의 가문과 독일 정부와의 오래된 상업적 관계와 신뢰성을 이용한다면 독일 정부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월렌버그가 1944년 9월 부다페스트 스웨덴 공사관에 도착할 무렵은 가장 악랄하게 헝가리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추방되는 시점이었다. 5월부터 시작된 체포, 이송된 유대인은 이미 40만 명 이상이었지만 헝가리에는 여전히 23만 명의 유대인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닥치는 대로 헝가리의 유대인들에게 스웨덴 국적의 임시 여권(일명 보호여권, Schutzpass)을 발급하여 이들의 탈출을 도우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임시 여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조짐이 보이자 그는 헝가리 외무부 장관 가보르 케메니 남작의 아내 엘리자베스 케메니 남작 부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9,000개의 패스를 더 발행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임시 여권을 소지한 유대인들이 점점 많아지자 그는 미국에서 지원받은 자금으로 부다페스트에 있는 32개 건물을 임대하여 '스웨덴 도서관' 또는 '스웨덴 XX연구소' 등의 간판을 달고 건물 입구에 스웨덴 국기를 계양하여 이곳을 면책특권이 있는 치외법권 건물로 선언했다.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기 이틀 전, 그는 헝가리 주둔 독일군 최고 사령관과 협상하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거주지 게토를 폭파하여 7만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려는 나치의 계획을 저지하기도 했다.
그의 저지 노력이 성공한 이유는 그가 협상 중에 과거 나치 장교들에게 주었던 뇌물 명단을 공개하고 또 전쟁이 끝난 후 전범자로 취급되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는 양면 작전이 통했던 것이다.
1944년 10월, 부다페스트는 소련군에 포위되었고 독일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전투가 한창이던 1945년 1월 17일, 월렌버그는 소련군 장군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소련군 첩자이자 헝가리 정치인이었던 사람의 투서로 인해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의 소식은 소련이 장악한 헝가리 방송국에서 전해졌다. 월렌버그와 그의 운전기사가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독일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이 방송은 고의적인 오보였다. 그는 이미 모스크바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1957년 2월 6일 소련 정부는 1947년 7월 17일 자 문서를 공개했다. 문서의 내용은 '죄수 월렌버그가 감방에서 심장마비 혹은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는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 보고서 역시 가짜임이 훗날 밝혀졌다. 1991년 러시아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월렌버그가 1947년 사망한 것은 맞지만 사인은 심장마비가 아니라 감옥에서 독글물로 처형당했다고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1987년 11월까지 월렌버그가 감옥에 있었다는 다수의 목격자들이 나왔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에 관한 미스터리는 해소되지 않은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