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화양연화> 두려운 사랑
영화의 두 주인공 장만옥과 양조위는 생애 처음으로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로 등장하기 전의 두 사람은 홍콩 영화계에서 그저 그런 배우였다.
1964년생인 장만옥(張曼玉, Maggie Cheung)은 20살에 미스 홍콩 2위를 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화양연화>에서 보여주는 그녀의 늘씬한 몸매와 치파오의 아름다움은 키가 170cm 이르는 그녀 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장만옥은 홍콩인이 아니라 영국인이다. 그의 가족이 8살 때 영국으로 이주하여 영국 시민권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망설이던 그녀는 차우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호텔에 도착한 그녀는 뛸 듯이 계단을 오르지만 차마 문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오고 만다. 이때 그녀가 입은 겉옷은 불타는 붉은색이며 심지어 복도의 커튼도 화려한 붉은색이다. 하지만 그 안에 입은 옷은 하얀 블라우스이다.
붉은색은 불꽃처럼 이글거리는 사랑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고 그 안에 입은 하얀 블라우스는 불륜을 종착지를 억제하는 순수함을 상징하는 것 같다.
하지만 두 번째 호텔을 방문할 때는 흰옷은 사라지고 온통 붉은색 옷만 입고 나온다. 심지어 두 사람이 탄 택시조차도 붉은색이다.
침대를 곁에 둔 호텔 방에서의 모습은 종종 호텔의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훔쳐보는 듯한 화면 구도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관음'이다. 이 역시 영화 속의 어두운 밤거리와 좁은 골목길, 그리고 두 사람이 스쳐갈 수밖에 없는 아파트의 좁은 복도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영화에서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은 짙은 애정 씬은 물론 키스하는 장면조차 없다. 하지만 영화에 깔리고 있는 음악과 함께 두 사람이 보여주는 침묵의 연기는 다른 어떤 영화의 애정 씬보다 더 격렬하게 관객의 마음을 애태운다.
사실 영화에서 진짜 불륜의 대상 - 두 사람의 배우자 모습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간혹 뒷모습만 보이고 음성으로만 들린다. 그리고 기껏해야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언급되는, 각자의 배우자가 갔다고 여겨지는 출장지와 그들의 선물 - 핸드백과 넥타이에 관한 대화만으로 그들의 불륜을 짐작할 뿐이다.
두 배우자의 불륜은 주인공 두 사람이 모두 알고 있고 공유하는 사실이지만 실제의 불륜은 두 주인공자신들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고 진작부터 마음속에 싹튼 불륜을 정당화하기 위해 배우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서로 공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뜬금없이 "당신 애인 있어요?" 하는 질문에서 이미 정해진 답을 듣지만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심정은 둘 다 한 번씩 내뱉는 대사 "우리는 그들과 달라"이다.
절제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감정 상태는 그녀가 입고 있는 흰색 치파오를 통 이미 알고 느끼고 있는 '불륜을 제어하는' 이성과 감정의 교차적인 변화를 알 수 있다.
차우 양조위는 느닷없이 싱가포르로 떠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왜 하필 싱가포르일까? 이는 두 사람의 밀회 장소인 호텔의 룸 넘버가 2046인 것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 2046은 홍콩 반환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리고 1997년은 홍콩의 조차 기간 99년이 끝나는 해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과 중국의 정부는 그전부터 이에 관한 문제를 의논했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 지도자 등샤오핑(鄧小平)은 1997년 조차 기간을 넘기면 홍콩에 대한 단전 단수는 물론 100만 인민군을 동원해 밀어버리겠다고 공갈을 쳤다.
이에 대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1982년 등샤오핑을 만나 '10년 더 연장'을 희망했지만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등샤오핑은 대신 약속하기를 50년 동안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실시하겠다고 하며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행정은 홍콩의 자치에 맡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따라서 2046년까지는 보장된 홍콩의 자치 행정이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중국 정부의 간섭은 심해지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다. 따라서 영화 속의 1962년은 1997년을 앞둔 홍콩의 불안한 모습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양조위가 가고 싶어 하는 싱가포르는 이들 홍콩인들에게 일종의 드림랜드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는 영국이 지켜낸 곳이고 완벽하게 자치를 누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룸 넘버 2046이 미래를 향하는 공간이자 현실의 도피처가 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집착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다 보면 현재의 사랑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