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본색>의 숨겨진 이야기

1. 오우삼의 일생

by 발길 가는대로

8, 90년대 모든 한국 남자들의 로망 주윤발의 영화 <영웅본색 英雄本色>이 리메이크 영화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987 9523 개봉 포스터.jpg 1987년 5월 23일 첫 개봉 포스터

1986년 8월 2일 자정, 홍콩의 해운극장에서 한 영화의 시범 상영이 있었다. 러닝 타임 95분이 지나고 영화의 엔딩 자막이 올라갈 무렵 영화관의 가장 구석진 곳에 한 남성이 초조한 듯 서성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앞머리가 살짝 벗겨지고 눈이 작은 40대 남자의 발 밑에는 이미 그가 피운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계속 담배를 피운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영화가 끝나고도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관객들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중년의 남자가 ‘틀렸구나’ 하고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모든 관객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며 함성을 질렀다.


“Mark!”, “Mark!”


극장에 불이 켜지는 순간 중년의 사나이 바로 앞에 앉아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 드러나고 관객들이 그를 알아보았다. 순식간에 관객들이 그를 향해 몰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Mark 따거!”


주윤발(周润发)은 환하게 웃으며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이어서 그는 몸을 돌려 중년의 남자를 향해 악수를 청하고 관객들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중년의 남자는 막 40세가 된 오우삼(吴宇森) 감독이었다.


오우삼은 이 당시의 기분이 어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사람들이 미쳐버렸다"


오우삼은 1946년 지금의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가 일대에서 가장 큰 부자인 대지주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집을 떠나 타지에서 공부를 하고 그의 어머니 역시 독학으로 배운 파마 기술로 주변 사람들의 머리를 해주는 등 비교적 윤택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오우삼이 3살이 되었을 때 등에 종기가 생겼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으나 등의 종기는 순식간에 등 전체로 번지고 말았다. 의사의 진찰 결과 난치성 등종양으로 밝혀졌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울어 대는 자식을 보다 못한 그의 부친은 백방으로 명의를 찾아다니며 아이의 치료에 전념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하지만 다행히 독일에서 막 유학을 마치고 온 외과 의사를 만나 수술을 하고 병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가 5살이 되었을 때 그의 부친은 온 가족을 데리고 홍콩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의 부친은 홍콩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병에 걸려 거의 10년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다. 오우삼의 가족은 점점 가난해졌고 급기야는 교회의 위문금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1956년 홍콩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교회의 지원도 끊기고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한 미국인 부부의 도움으로 또래들보다 4년이나 늦은 나이에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20살이 되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폐병을 앓던 부친이 죽자 학교를 더 다닐 수 없었던 오우삼은 시간만 나면 영화관으로 가던 모친과 함께 종일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다.


이는 당시 홍콩에서 성인 1명이 입장하면 어린이 1명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독 또래들보다 키도 작았고 어리게 보였던 그는 점점 영화에 빠져들었다.


간혹 모친이 영화관에 가지 못할 때는 혼자서 영화관 앞에 서서 입장하는 어른들에게 자신을 데리고 입장해 달라고 간청하여 영화를 보았다.


그 외의 시간은 주로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다. 친구가 없던 그는 교회에 모여 있던 비둘기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의 영화에 교회와 비둘기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다.


홍콩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1967년 학업을 포기한 오우삼은 타이완의 학비가 비교적 싸다는 얘기를 듣고 타이완의 영화예술학교에 진학했다. 학업과 병행하여 학비를 충당하기 위해 일을 해야 했지만 자신이 영화를 배운다는 사실에 힘든 줄도 몰랐다.


1971년 학교를 마친 그는 타이완의 국태 영화사에 취업을 했으나 영화사는 경영 부진으로 곧 문을 닫았다. 그 무렵 홍콩의 쇼브라더스(邵氏影业)에서 인재채용 공고가 있어 다시 홍콩으로 건너갔다.


오우삼이 쇼브라더스에서 당시 최고의 흥행 감독 장철을 만나 그의 수하로 들어간 것은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행운이었다.

젊은 오우삼.jpg

그는 장철의 문하에서 점점 영화의 깊은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1973년 27세가 된 그는 장철의 추천을 받아 영화감독으로 데뷔할 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영화 <과객过客>이라는 영화는 '내용불량' 판정을 받아 상영금지 조치를 당하고 말았다.


다시 2년 후 영화를 다시 편집하여 개봉했으나 시장의 반응은 매우 밋밋했다. 결국 그는 스승 장철과 의논하여 당시 쇼브라더스와 쌍벽을 이루던 골든하베스트(嘉禾影业)로 소속을 옮겼다. (이 무렵 그는 결혼도 했다)


이후 그는 골든하베스트에서 당시 흥행에 비교적 유리하던 코미디물 영화를 몇 편 연출하여 자리를 잡았지만 뚜렷하게 성적으로 내지는 못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홍콩의 경제는 활기를 찾고 있었고 영화계도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었다. 장철이 주도하던 무협물에 식상한 관객들은 새로운 즐길 거리를 찾아 영화를 외면하고 있었다.


이 무렵 오우삼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홍콩 영화계에 데뷔한 서극(徐克)과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홍콩의 TV방송(TVB)에서 일을 하던 시남생(施南生 Nansun Shi)과 사귀게 되었다.


당시 오우삼은 34세, 서극은 30세, 시남생은 29세의 나이였다. 이들 세 사람은 금방 의기투합했다. 서극과 시남생은 결혼한 사이였다.

서극과 시남생.jpg 서극과 시남생


1986년 1월 어느 날, 세 사람이 환담은 나누면서 서극이 1967년에 개봉했던 영화 <영웅본색>을 리메이크하자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우삼이 감독을 맡기로 하고 서극과 시남생은 공동 프로듀서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은 밤을 새워 대본 작업에 돌입했으며 투자자를 모집하여 필름 워크숍(Film Workshop)이라는 프로덕션을 창립했다.


특히 시남생은 ‘스튜디오의 집사’라고 불릴 정도로 온갖 잡일, 영화사의 행정, 재무, 배급 등의 실무를 모두 맡았다. 서극은 영화에 잠깐 (심사위원 역)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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