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양조장의 여주인
첫날밤이지만 문둥병이 무서워 밖에서 자고 일어난 구순이에게 일꾼들은 술을 뿜어 준다. 당시의 농촌 풍습은 고량주가 병을 예방하고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랑이 죽었다.
장꿰가 죽자 일꾼들이 짐을 싸고 떠나가려고 하자 구순이가 이들을 붙들며 "우리가 잘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는 생략된 번역이다. 실제로는 "사업이 잘되면 이익을 나눠줄게"라고 말한다. 일종의 종업원지주제를 제안한 셈이다. 구순이가 양조장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1976년 9월 영원할 것 같았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죽자 10년 동안이나 중국 대륙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문화 대혁명의 광풍도 끝이 났다.
이후 1980년부터 덩샤오핑(鄧小平)이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가 되어 '개혁'과 '개방'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사회 변화에 따라 중국 문화계 전반에 새로운 사조가 생기기 시작하고 젊은 지식층들이 가장 먼저 적응하고 사회를 바꾸기 시작했다.
1950년생 장이머우도 이 무렵 대학에 진학하여 영화를 공부했고, 1955년생 모옌도 중단하고 있던 집필 활동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은 것이었다.
영화 촬영에 진심이었던 장이머우는 비싼 카메라 구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피를 팔았고 나이가 많아 대학 입학이 거절당하자 교육 당국에 40여 차례 포트폴리오를 보내 끝내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 젊은 지식층들은 10대 시절에 문화 대혁명을 겪으며 모두 농촌으로 이주하여 강제 노역에 종사한 공통적인 이력이 있었다.
국가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었지만 이로 인해 외부의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지를 깨닫게 되었고 이러한 외부의 폭력은 스스로의 힘으로 맞서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영화 <붉은 수수밭>에는 두 번의 폭력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비적 떼가 나타나고 두 번째는 일본군이 나타나 약탈을 시작한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산둥 지방은 예로부터 비적 떼의 출몰이 잦은 곳이었다.
예를 들면 수호지(水滸傳)에 나오는 도적 무리들의 본거지 양산박(梁山泊)이 산둥에 있고 또, 청나라 중기에 발생했던 백련교의 난, 홍건적의 난, 그리고 청나라 말기의 의화단 사건 등도 모두 산둥 지역에서 발생했던 민란이었다.
이토록 숱한 민란을 겪으며 살아남은 민중들의 삶이 어떠했을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때로는 순응하고, 때로는 교활하고, 때로는 용감하고, 때로는 의리도 지키야 살아남는다는 그 모든 삶의 지혜가 영화에 녹아 있다.
구순이가 수수밭에서 가마꾼의 겁탈을 받아들인 것도 그 후 양조장을 찾아온 그를 결국 받아들이고 가정을 이루는 것도 이러한 민초들의 삶과 일맥상통하는 생존의 도리였던 것이다.
비적 떼에게 끌려가 인질의 값을 치르고 양조장으로 돌아온 구순이는 점차 양조장 생활에 적응해 간다. 술의 제조 과정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숙련공 라오한(羅漢)이 경건하게 진행하는 의식행위도 지켜본다.
일꾼들이 술을 만든 후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이 노래의 제목은 '酒神曲(주신곡)'이다. 이 노래는 민요가 아니라 따로 작곡을 하고 장이머우가 가사를 만들어 영화에 삽입한 노래이다.
이 노래 역시 영화의 히트에 힘입어 중국인들이 자주 부르는 애창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번 들으면 쉽게 잊기 힘든 좋은 노래이다. (가사의 일부를 따 九月九,釀新酒라고도 한다)
때마침 구순이를 겁탈했던 가마꾼 위잔아오가 술에 젖은 모습으로 나타나 느닷없이 바지춤을 내리고 술항아리에 냅다 오줌을 갈기며 술맛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지켜보라고 자신 있게 큰소리치며 마치 자신이 양조장의 주인인양 행동한다.
구순이는 위잔아오의 무례에 한마디 말도 없이 그를 지켜보지만 바라보는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다. 자신의 순결을 가져갔지만 자신을 구해주기도 했던 남자에게 느끼는 애틋함도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아는 고량주는 까오량(高粱, 수수)를 주원료로 만든 술이다. 영화 제목의 붉은 수수는 붉은 갈색을 띤 품종을 말하는데, 현재 이 품종의 수수는 수확량이 적다는 이유로 거의 생산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영화에 나오는 붉은색의 고량주는 시장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 전의 일이다. 현재의 중국 고량주는 전부 흰색이다. 그래서 이를 바이주(白酒)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중국 술이 전부 까오량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찹쌀을 원료로 만든 누룩을 발효시킨 황주가 있고 유명한 술 우량예(五粮液 오량액)는 까오량 외에 밀, 맵쌀, 찹쌀, 옥수수 등 5곡을 원료로 만든 술이다.
한국에서 자주 칭하는 술 중에 배갈 혹은 빼갈이 있다.
이는 중국 산둥 성, 허베이 성에서 생산되던 바이주의 상표 중 하나인 바이간(혹은 빠이갈 白干)을 말한다. 중국에서 가장 값싼 술 중의 하나인데 한 때 우리나라에 많이 수입되어 대중에게 소개되면서 배갈로 부르게 된 것이다. (현재 이 술을 마시는 중국인은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