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영화의 결말은 그런대로 해피엔딩이다. 앞날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는 푸궤이가 업고 가는 손자와의 대화에 나타난다.
과거 아들과의 대화에서 '소 다음은 공산주의'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던 푸궤이는 손자가 아들이 했던 물음 '소 다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들에게 '소 다음은 공산주의, 매일 만두를 먹을 수 있고,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주니까'라고 했지만 푸궤이보다 먼저 손자가 답을 주었다. 손자는 '소 등에 탈 거야'라고 했다.
이는 '공산주의'(이념 투쟁)를 극복하며 살겠다는 메시지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 푸궤이는 '기차, 비행기를 타야지'라고 하면서 밝은 미소를 짓는다.
영화에 비해 소설은 훨씬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거의 모든 주변 인물들이 죽기 때문이다. 롱얼이 죽고, 촌장과 춘셩도 주자파로 몰려 죽는다. 그리고 푸궤이의 가족들도 차례차례 죽는다.
그의 모친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은 영화와 달리 피를 팔다가 죽고 이때 매혈을 담당하던 여자의 남편이 춘셩이었다.
푸궤이의 딸 펑샤는 난산 끝에 죽고 펑샤가 죽은 지 3개월 후 아내 지아쩐도 병으로 죽는다. 사위 얼씨는 공사판에서 돌덩이에 깔려 죽고 손자 만두는 콩을 먹다가 급체로 죽는다.
푸궤이는 끝까지 살아남는다.
끊임없이 아무 것도 아닌 평민으로 소박하게 살기를 원했고, 운명의 굴레는 그를 계속적으로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그래도 그는 살아있는 지금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함께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것은 그림자극 인형들을 보관하던 상자였다. 상자는 푸궤이의 손자가 키우는 병아리 집으로 용도가 변경된다.
이때 푸궤이가 말한다.
"어때? 이게 더 크고 좋지?"
푸궤이는 자신의 구질구질한 삶이 손자에게 대물림되지 말고 더 크고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딸의 무덤 앞에서 세상을 비꼬고 있었다. 홍위병들에게 타도되어 죽은 딸의 출산을 도우던 의사는 지금 만두를 먹지 않고 더 비싼 쌀밥을 먹고 있을 것이라고...
이 영화 출연으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획득한 거요우(葛優 갈우)의 연기는 참으로 천재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화계 입문은 녹록지 않았다.
1957년 베이징 출생인 그는 부친이 영화배우 출신이고 모친 역시 영화제작소에서 극본 편집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좋은 영화계 진출의 배경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연기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고교를 졸업한 후에 돼지 농장에 배치되어 직장생활을 했다.
하지만 신체가 약한 그는 3년간 계속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부모님을 졸라 예술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세 차례나 낙방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눈높이를 낮추어 전국노동조합에서 운영하는 문예단에 취직하여 겨우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었다.
1990년부터 거요우는 승승장구했다. 대중들이 그의 연기에 감복하고 감독들 마다 그를 찾아 출연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1년 내내 거요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을 정도였다.
1992년은 그야말로 거요우의 해가 되었다. 그가 출연한 드라마, 영화에서 모두 최고의 주연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장이머우, 궁리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거요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수많은 제품의 광고 모델이 되어 그의 모습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은 그의 아내 허총(賀聰)이다. 초등학교 미술교사를 했고 지금은 남편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거요우가 뜨기 전에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지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그를 도우고자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다. 결국 부모를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1987년 결혼에 성공했다.
2014년 한동안 잠잠하던 장이모우의 소식이 세간의 가십거리가 되었다. 이른바 748만 위안(한화 15억 원) 벌금 사건이다. 장이머우가 '한 가정에 한 자녀'라는 정부의 시책을 어긴 사실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었다. 장이머우는 군말 없이 벌금을 납부했다.
아래 사진은 장이머우의 가족사진이다. 그의 모친, 전처소생의 딸과 스위스 국적의 사위, 그리고 현재 같이 살고 있는 아내와 2남 1녀의 자녀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