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패왕별희> 경쟁
장이머우와 천카이거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중국 영화계에서 먼저 이름을 날린 사람은 천카이거였다. 우선 그의 출신이 장이머우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금수저 집안이었다. 그의 부친 역시 영화감독이었으며 그의 모친은 베이징에서 알아주던 시나리오 작가였던 것에 반해 시골 출신의 장이머우는 지방의 작은 영화 제작소 촬영기사에 불과했다.
1984년 천카이거의 첫 출세작이자 감독 데뷔 작품인 영화 <황토지 黃土地>의 촬영기사가 바로 장이머우였다. 이 영화는 그해 스위스의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2등에 해당하는 은표범상을 수상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 영화는 본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 모두 베이징 영화학원(北京電影學院) 출신이었지만 장이머우에 비해 2살이나 어린 천카이거는 집안 배경을 바탕으로 감독 데뷔는 4년이나 빨랐고 학교에서도 2년 선배였다.
이런 그가 첫 영화부터 대박을 터뜨린 셈이었다. 그래서 천카이거는 전형적인 베이징 사람답게 시골 지방 출신의 장이머우를 은연중에 무시하곤 했다.
하지만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는 장이머우가 1988년 공리(鞏俐)를 주연으로 내세운 영화 <붉은 수수밭, 중국명 홍까오량 紅高粱>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자 단번에 역전되었다. 이 영화는 중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재능을 보인 장이머우는 엄청나게 각광을 받았고 이어서 그는 공리를 주연으로 내세워 1990년 영화 <국두 菊豆; Ju Dou>, 1991년 영화 <홍등大红灯笼高高挂;Raise the Red Lantern>을 잇따라 발표하며 두 영화 모두 아카데미 국제 영화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92년의 영화 <귀주이야기 秋菊打官司, The Story Of Qiu Ju>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공리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자 중국 영화계는 온톤 장이머우와 공리의 천하가 되고 말았다.
공리는 베이징의 중앙희극학원에 재학 중에 장이머우에게 발탁되었다. 당시 공리의 나이 20살이었고 장이머우는 35살의 유부남이었으나 두 사람은 매년 영화 한 편을 찍을 만큼 전성기를 누리는 동시에 두 사람의 사랑도 타인의 시선을 무시할 정도로 무르익어갔다.
문제는 공리였다. 처녀의 신분으로 노골적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너무도 당연하게 그녀는 장이머우에게 결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이머우의 태도는 단호했다. 동거는 하지만 결혼은 안 한다는 주의였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공리가 장이머우 몰래 출연을 결심한 영화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그것도 장이머우와 경쟁 관계에 있던 천카이거의 영화 <패왕별희>였던 것이다. 장이머우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서일까?
천카이거 역시 장이머우에 못지않은 바람둥이였다. 결혼도 하지 않은 31살에 만든 데뷔 영화 <황토지>가 히트를 치자 그는 천재 감독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베이징 영화계를 휘젓고 다녔다. 하지만 부모님의 등살에 떠밀며 36세에 결혼한 여자는 그에 못지않은 명성을 누리고 있던 홍황(洪晃)이었다.
홍황은 중국에서 소문난 천재소리를 듣던 여자였다. 12살에 외교부 선발 영재 어린이에 선발되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오기도 했다. 두 사람은 4년 정도 부부 관계를 유지했다. 2년 정도 동거하다가 실제 결혼 생활은 2년이었다.
홍황과 정식으로 헤어진 천카이거는 베이징의 뒷골목 가십에 의하면 끊임없이 공리에게 집적거렸다고 한다. 물론 영화 출연이 핑곗거리였다. 하지만 결국 장이머우에게 들켜 포기하고 1991년부터 또 한 사람의 유명인사 아평(倪萍)과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아래 사진에서 보다시피 아평의 이미지는 공리와 판박이다.
아평은 전 중국인이 모두 아는 유명 아나운서였다. 중앙 CCTV의 대형 연예 프로그램의 단골 사회자였던 것이다. 결국 천카이거와 아평은 동거에 대한 소문이 커지자 결혼식을 올렸다. 1991년이었으니까 아마도 <패왕별희>를 열심히 찍고 있던 무렵이었다.
1996년 아평과 천카이거는 결국 이혼하고 말았다. 천카이거는 이혼 수속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여배우 천홍(陳紅)과 결혼했다.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가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