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다. 또 새집이다. 더 이상 어릴적에 살던 한 집으로 가는 꿈을 꾸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낯선 공간이지만 나의 무의식이 이곳이 나의 집이라고 알려주는 낯설고도 익숙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얗고 부분적으로 칠도 벗겨지고 낡은 이층 단독주택이었다. 한방은 너무 길쭉했고 내 방은 두면이 미닫이 문으로 되어있었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의 구조 자체는 조금 답답한 듯 평범했는데, 문제는 집 바깥이었다. 집 주변을 새파란 바다가 감싸고 있었다. 집과 바다사이의 거리는 불가 4미터 남짓이었고 평지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집을 시작으로 급격한 경사지로 바다로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발을 헛발질 하면 바다로 바로 떨어질 구조였고 바다와 집 사이에는 아주 가느다란 하얀 로프가 하나 느슨하게 처져있는 것이 다였다. 바다는 하얗고 조용한 집에 비해 역동적이고 생명력이 넘쳤다. 동시에 새파랗고 깊고 무서웠다. 빠지면 다시는 헤어나오기 힘들어 보였다. 경사지는 하얀색 시멘트 같은 인조적인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돌의 표면이 울퉁불퉁해서 넘어지면 무릎이 심하게 까질 것 같았다. 나는 로프까지 떨어지지 않기위해 조심조심 더듬더듬 한 발자국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토요일 아침은 그런 날이다. 조금 늦장을 부리고 싶은데 곧 열시 전에는 집에서 나가야 무사히 수업을 시작할 수 있는. 아주 여유롭지만은 않다. 왜냐면 아이들과 이불안에서 뒹굴뒹굴도 하고 싶은데 그럴수만은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하늘이가 아침부터 마음에 안드는게 많은지 투정을 부렸다. 얼굴에 두드러기가 몇 달째 가라앉지 않아서 피부과에 보내야 했는데, 오늘따라 아침밥도 안먹고 부쩍 피곤해하고 짜증을 내다 못해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나는 마음이 급해진다. 일찍 가야 덜 기다리고 진료를 볼텐데. 오늘따라 얘는 왜 이러는 걸까. 옆으로 엎어져 울고 있는 아이에게 다그치고 화를 낸다. 오랜만에 큰 목소리가 나온다.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큰 목소리는 이내 힘을 잃는다. 이런 것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혼자 일어나는 것을 힘들어하는 하늘이에게 가까이 가서 귀에 속삭인다. ‘엄마 목에 팔둘러.’ 울다가 그 말은 잘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목에 팔을 두른다. 겨우겨우 천천히 소파 앞에 앉혔다. 혼내면서 일어나라고 했을때는 절대 움직이지 않던 아이가 엄마 목을 안으라고 하니까 천천히 알아서 일어난다. 이럴 때마다 깨닫는다. 큰 목소리는 진짜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 결국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평소에 쌓아둔 서로의 온도, 다정함, 그렇게 차곡 차곡 쌓아지는 작은 관계들 뿐이다. 그런 것이 없다면 아이는 감정이 편안하지 않을 때,
움직이지 않는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다.
하얀 돌길에서는 넘어져서도 발을 헛디뎌서 떨어져서도 안된다. 저 가는 로프가 얼마나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까? 나는 곧 저 새파란 바다로 빠지게 될 것이다. 내가 집이라고 믿고 있는 하얀 단독주택은 주변을 애워싸고 있는 파란 바다에 비하면 돌멩이처럼 작았다. 완전히 무너지지도 않았고 낡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근사할 것도 없는 그런 집. 파도가 갑자기 들이친다. 안전막이라고 생각했던 로프 안쪽으로 하얀 물거품이 파고 들어와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옷을 적셨다. 불안정한 통제였다. 이 경사도 그 로프도. 새파란 감정은 너무 가까이 와 있고, 조금만 ‘균형’을 잃으면 깊이 빠질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회화적인 것과 그래픽적인 것의 경계와 균형. 요즘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을 하면서 나는 이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내가 잘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과, 그것이 책의 형태로 얹어졌을 때 좋은 지점, 그 ‘균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을 알고 인식하는 과정까지 도착하는 것도 오래 걸렸고, 아직도 적절하게 구현해 내는지 늘 확신이 없다. 책을 만드는 어떤 과정도 빠르고 당연하게 오는 것은 없었다. 아주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가끔 천천히 더디게 얻어지는 지점이 있었다. 이런 인내심을 훈련하게 되면 언젠가는 우연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출이 가능해 지는 빈도수가 늘어나겠지.
나는 오늘도 다시 그 하얀 경사 위에 서 있다.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마음을 쏟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 조용히 경고를 보낸다.
중심을 잃지 말라고. 파란 바다가 아름답다고 마음과 눈을 뺏기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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