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맞은편에서 먹고 있다. 무례하게도 내가 반대편 의자로 두 다리를 뻗는다.
그것도 신발까지 벗고. 젓가락이 또르르르 식탁 위를 굴러 내 발 등위로 떨어진다.
-언니. 그 젓가락 좀 주세요.
맞은편에 앉아있는 사람이 나를 바라본다. 항상 한결같은 다정한 눈으로. 어떻게 나를 저렇게 봐주는 걸까? 저 사람은 알까. 자기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그리고는 알았다는 듯이 웃으면서 젓가락을 주어서 나에게 건넨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렇게 불러요?
그러게. 나는 너보다 나이가 더 많은데...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내가 갑자기 왜 호칭을 바꾼 걸까?
개꿈이 끝이 없다.
전화가 왔다. 얼굴은 보지 못하고 목소리만 귓가에 울린다. 전화를 받으려니까 어쩐지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다가 오래지 않아 몇 마디가 더 들리니까 툭 하고 긴장이 풀린다. 분명히 스트레스받을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까. 힘이 빠져서 침대로 몸이 엎어진다. 한쪽 팔을 기대고 반대쪽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웅얼거린다.
-아니거든요. 남의 일이라고 다 괜찮다고 그러네.
아. 내 말투가 왜 이러지? 재수가 없다.
맙소사. 내가 이렇게 재수 없는 말투로 웅얼거리다니.
평소에 나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주둥이를 앞으로 모으고 실없게 웃으면서 무언가를 웅얼거린다. 왜 이래. 소름 끼쳐하며 잠에서 깨버리고 두 눈을 뜬다.
아이들이 갓난아기일 때, 새벽에 한 아이가 울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잘 자고 있던 다른 한아이마 져 따라 울게 될 테니까. 그러면 곧 온 가족이 깨겠지. 결국 더 자주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자게 됐다. 내가 자는 게 조금 불편해도 아이가 편안해 보였으니까. 내 품에 들어오기만 하면 곧바로 울음을 멈췄으니까. 하지만 두 팔로 아이 둘을 모두 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강원도에 있던 엄마가 신생아 쌍둥이를 나 혼자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며 몇 달 같이 돌봐주러 오셨다. 나머지 한 아이가 안쓰럽다고 잠이 깨는 새벽이면 엄마는 그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신생아 시절은 짧고 격렬하게 지나갔다. 너희들이 그 순간을 다 기억할까. 너네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시간이 한참 지나 아이들은 많이 컸다. 작년이었나.
아이가 갑자기 외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고. 명절도 아닌 데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왜? 갑자기? 이 밤에 외할머니 집에 가겠다고 그래?
신생아 시절, 엄마가 자주 안아주었던 그 아이가 웅얼거린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어. 외할머니가, 외할머니가 난 가끔 ‘엄마’ 같아.
아이의 말에 서운한 마음보다는 동시에 더 깊은 어느 층이 건드려졌다.
얼마 전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나는 무심코 ‘엄마’라고 외치며 옆 벽을 짚는다.
그리고는 바로 머쓱해진다. 쌍둥이를 임신했던 동안 단 한 번도 엄마와 통화하지 않았다. 의지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기대지 않는다라고 정해둔 것이다. 그러다가 꼭 이럴 때, 무방비 상태가 되면 나도 모르게 ‘엄마’를 외친다.
외할머니가 너를 많이 안아줬지. 네가 아주 어릴 때.
그 어두운 밤 속에 따뜻한 품이, 그 냄새가 그게 너의 ‘엄마’인 걸까?
너네는 그 어린 시절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은 참 어리석지.
인간의 기억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는 나는, 내가 뭐를 바라는 지도 사실 잘 모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있는 나만큼,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렇게 오늘도 깨어있는 동안 아무것도 바라거나 원하지 않는 척한다.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 둘이 이불 위에서 뒹굴 거린다. 한 아이를 안아서 잠을 깨운다. 그때 나머지 한 아이가 드디어 이불에서 얼굴을 꺼내면서 중얼거린다.
-엄마. 나도 안아주세요.
갑자기 마음이 아프다. 그냥 안아달라는 말인데.
아기 때처럼 울지 않고 말로 저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그게 또 기쁘다.
자리를 옮겨 천천히 아이를 꼭 껴안는다. 이 온기를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