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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성지를 아시나요?

주말 러닝코스는 상수동까지 갈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있다.

by 이수연

합정역에 좋아하는 장소가 몇 곳 있다. 독립서점과 알라딘 오프라인 매장, 교보문고와 식당가 같이 약속 잡기에 좋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책을 엄청 사대는 내가 지나치기 힘든 장소들이 많다. (많이 읽는다기 보다는 그림책, 만화책, 그래픽노블, 국내/해외 에세이, 심리학과 관련된 책, 좋아하는 작가분들의 추천도서 등 다양한 분야를 보고 수집하기 때문이다. 다 쓸 곳이 있다.)

합정역 부근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 공원 같이 누군가와 약속 장소로 잡기에는 애매한 장소이다. 역에서 조금 걸어가야 하기도 하고, 변변한 카페 같은 것도 없고 그저 풀과 나무만 있는 장소라서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할 수 있다. 이 두 곳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추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유도공원은 내가 스무 살 근처쯤 한국과 프랑스 건축회사와 협업해서 만들어졌다. 기존의 하수 처리장의 구조를 남기면서도 새로운 식물원과 다리들이 설치되면서 기존의 신축 건축물들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잔뜩 담긴 특이한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작년에는 귀염둥이 다해와 파티(Pati)에서 수업 끝나고 버스 타고 나오다가 한번 가볼까? 하고 충동적으로 합정역 근처에서 걸어서 잠시 다녀왔었다. 걷는 거 싫어하는 동행자에게는 비추천한다. 오랜만에 가도 선유도 공원은 참 좋았다. 한강을 바라보며 미로같이 꼬여있는 기둥들 사이로 담쟁이덩굴들을 볼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의 손길과 자연의 생명력이 어우러진 분위기가 내 취향인 것 같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기둥과 작은 물탱크들, 그사이를 오가는 덩굴들, 공장이자 공원이고 식물원인 선유도 공원. 낡아 있는 것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만들어내기 힘든 것이니까, 그 흔적을 살려두고 새로운 구조물들이 합쳐진 집을 좋아하는 내 취향은 아마도 스무 살 무렵, 선유도 공원에서부터 시작한 건 아닐까?

두 번째 장소인 절두산 순교성지는 26살 때 처음 가보았다. 그때는 나는 영등포에 살고 있어서 이 장소가 조금 생소했는데 그것도 자정에 가까운 매우 늦은 시간에 회사를 같이 다녔던 지인과 지나가다 들어가게 되었다.

밤이라서 건축물의 전체적인 형태 같은 것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손바닥 만한 묘비들이 작은 십자가와 함께 작게 공동묘지가 만들어져 있었고, 그때부터 내가 걸어 들어온 서울과 이곳이 완전히 분리된 곳이구나, 이곳은 서울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그래서인지 아무도 없었지만,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푸른 5월의 나무들과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표정의 조각상들을 다 볼 수 있었다. 나에게 웬만한 미술관 전시보다 더 깊은 자극을 주었던 밤이었다. 어두운 공원을 걷다가 성당에서 자주 보던 촛대와 촛불들이 모여있는 곳이 보였다.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같이 왔던 사람과 길게 나누었던 것 같은데, 사진도 찍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자세하게 나지 않는다. 나뭇잎이 참 많았고 노랗게 조명을 받아서 아름다웠고, 기억나는 것은 그 촛대와 촛불이 다양한 기도메시지를 담고 빛나고 있었던 것, 걸어 나오는 입구의 노란 조명을 반쪽만 받은 아기 천사의 얼굴을 보았는데 살아있는 것 같아서 한참을 바라보았었다. 들어오면서부터 나가기까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다가 서울로 다시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 곳은 그 뒤로도 흔하지 않았다.


오늘은 주말 아침이고 늦게 집에 들어가도 되는 여유로운 일정이라 맘먹고 평소 보다 더 멀리 걸어보았다.

그러다가 내 러닝코스 끝에 절두산 순교성지의 외관이 바로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전문적인 의견입니다. 나는 이곳이 르 꼬르뷔지에의 롱샹성당의 외관과 비슷하게 보인다.) 새벽에 나가서인지 하늘이 분홍색과 회색이 섞여 있었는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이렇게 내 기존 러닝코스를 조금 더 넘어가면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 뒤로 3킬로 정도 더 걸어가니 성수역이 나왔고, 기존 망원유수지 한강변과 다른 고적한 분위기가 참 좋았다. 평일에는 무리가 되니까 안되고 주말코스로는 꼭 조금 더 걸어서 이곳을 정기적으로 보아야겠다.

순교성지안쪽도 오랫동안 못 가보았는데, 다음 주에는 여유롭게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도 다시 보기로.

뒷문 쪽인지 주차장을 따라 내려오면 순교성지 앞쪽에 공공장소로 긴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강을 바라보라고 만들어진 긴 벤치였는데 각도가 태닝베드처럼 생겨있었다. 내가 모르는 게 이곳저곳 많이 있구나.


어제 새로운 그래픽 노블의 러프 스케치를 하다가 내가 찾는 고가도로 및 놀이터, 배경은 공장지대여야 하는 자료를 구글로 찾을 수가 없어서 포기하고 단순하게 그렸었는데,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그 무드가 안 살아서 좀 맥이 풀렸었다. 그 페이지에서 멈추고 씻고 잤다. 절두산 순교성지에서 상수역으로 넘어오면서 화력 발전소가 있는데 그곳에 내가 찾던 고가다리와 그 고가다리 밑에 둥지를 틀고 있는 비둘기들, 그리고 그네가 있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몇 장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으로 천천히 걸어오면서 멋진 벽돌 환풍기와 사다리를 찍었다. 새벽에 나가서 배경 이미지를 얻게 될 줄이야. 주말의 시간여유 참 좋구나.


집에 와서 씻고 밥을 먹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고, 나는 또 내가 만들어 내는 세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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