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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결정

1월 중 페터비에리의 책과 함께 이주일을 보냈다.

by 이수연

감옥이었다. 아니, 하다 하다 감옥에 갇히기까지 한단 말인가. 모호했다.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잘 인식이 되지 않았다.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분명히 여자였다. 단발머리 그녀는 나에게 열쇠고리인지 팔찌인지 알 수 없는 민트색이 도는 보석이 알알이 박힌 액세서리를 사달라고 했고, 우리는 두 개를 사서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이번에도 장신의 연예인이 등장했고 글로 표현하기 힘든 느낌의 우아한 춤을 추셨다. 춤과 감옥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선명하게 알겠다. 나는 대체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있는데. 무엇이 나를 옥죈다는 말인가. 아침에 깨서 짧게 꿈을 복기하다가 최근에 본 책이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에 관한 책이라서 그런 소재들이 꿈을 이룬 것인지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한 권만 보지 않고 이 책 저책 왔다 갔다 하면서 보기 때문에 이주일이라고 말하기도 애매 하지만.

페터 비에리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제레미 아이언스 때문에 보려고 노력했지만 중간에 졸려서 꺼야 했다.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유튜버 밀라논나 할머니가 이 작가의 책을 추천하시면서 입문하게 되었고 올해 시작하면서 사두었던 책과 새로 산 책 세 권을 읽게 되었다.








세권 중 가장 페이지수가 적어 부담이 적었지만, 그렇다고 빨리 책장이 넘어가지는 않는 책이었다.

부제는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


22p

언어로 표현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혼란스러운 느낌들은 감정적 확신으로 변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에 그치지 않고 내적 구조까지 변경하는 이러한 과정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자기표현 과정을 통해 개인적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작업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의식적인 것을 언어로 나타냄으로써 의식 위로 끌어올리는 것도 이 작업의 하나지요. 어떤 경험에 대한 새로운 서술을 찾아내는 데에 설공해서, 이제 그 감정이 어떤 사람에게 느끼는 단순한 부러움이 아니라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포함된 것임을 밝혀낸다면 나의 인식은 새로운 국면에 도달하게 됩니다. 일단 인식된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는 것,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되지 못한 것을 의식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법은 우리가 언어적 발현을 통해 우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기 결정의 적용 범위를 내면으로 확장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자신의 감정에 동감하여 그 감정을 정신적 정체성에 융합시킬 수 있는 바탕인 현실적인 자아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지요.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이러한 융합은 자기 결정이 의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정은 임의로 켜거나 끌 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싫다고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25p

즉 나에게 경험된 과거의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는 전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절대로 사실 그대로의 중립적인 묘사가 되지 못합니다. 나의 이야기는 선택적이며 평가적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아상에 부합되도록 편집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아떨어지도록 언제나 적당한 첨삭이라는 요소를 포함합니다.


모든 자아상이 진위가 모호하고, 착각과 자기기만과 자기 설득으로 가득 찬 구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아상은 진실이 밝혀져 어쩔 수 없을 때나 도덕적으로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 등등 때에 따라 고쳐지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야기가 새롭게 짜이고 앞뒤가 맞는 또 다른 정황이 생겨나며 맞지 않는 부분은 억지로 잊히고 익히 알고 있던 것이라도 새로이 윤색된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이 과정은 물론 복잡하고 번거로우며 종종 기만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자기 결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거나 묵인하지 않고 그야말로 자기 삶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하기 때문이지요. 기억이 강력하게 압도적인 그 힘으로 어떤 의지를 자꾸만 방햐하거나 무시당하고 분열된 과거가 되어 우리의 경험과 행위를 비열한 어둠 속에 꼼짝 못 하게 옭아맬 때, 정신의 지하 감옥이 되고 맙니다. 오직 그들을 언어로 불러내야만 그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이야기될 때 이해 가능한 것이 되고 우리는 기억의 힘없는 희생양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습니다. 기억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이 생기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잊고 싶다고 해서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억하는 존재로서의 우리는 자기 결정적 존재가 아닙니다. 즉 기억이 휘두르는 힘과 끈질김을 우리의 정신적 정체성의 표현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나면 기억은 더 이상 외부 이물질이 아니게 되어 적군으로서의 공격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성되는 스토리가 있는 자아상은 미래에까지 죽 이어져 쓰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보내면서 미래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한 계획을 가지고 만나게 되는 그 무엇으로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구리고 누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그림, 즉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는 그대로 우리의 과거와 일치하는 그림이 필요합니다.


29p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명확한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독서보다 좀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이야기를 직접 쓰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무의식의 판타지라는 깊은 기저에서 온 것일 때라야만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 큰 매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내적 검열의 경계를 느슨히 하고 평소라면 무언의 어둠 속에서부터 경험을 물들이던 것을 언어로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거대한 내적 변화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언어와의 관계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경험을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내는 일입니다. 그중에는 자신만의 목소리, 자신만의 선율을 찾으려는 시도도 포함되고요. 문학적 글쓰기는 말에게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 시적 힘을 되돌려주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다시 한번 새롭게 습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말이 자신에게 맞거나 맞지 않는가 하는 물음과 지속적으로 부딪히게 되지요.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가 쓴 글이 어떤 울림을 가지는지 알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자 합니다.


33p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 중에는 특히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경험되는 것도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도덕적 친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종류의 만남 안에서는 복합적이고 깊은 도덕적 감수성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를 이용하기만 하려는 적수들 사이에서는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도덕적 친밀감이 있는 만남에서는 분노와 원망, 도덕적 수치심, 후회 같은 감정도 일어나긴 하지만 또한 의리나 상대방의 도덕적 숭고함에 대한 감탄 같은 감정도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정들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단순히 사회적 게임을 같이하는 냉정한 동반자였다면 절대 될 수 없는 중요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중요한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감정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을 계속적으로 던지기 때문이지요. 도덕적 친밀감은 비판적인 내적 거리를 자기 자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유지하는 인간관계입니다.


49p

우리는 말하고 또 말하면서 결국은 우리가 말한 내용을 확신한다고 스스로 믿어버리며 행동으로까지 가져갑니다.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도 말과 현실 사이에 거대한 격차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56p

표현의 형태는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말이나 행위가 아니어도 됩니다. 음률이나 붓의 터치, 공예, 비디오나 사진, 춤, 옷 입기를 통해서도 가능하고 요리나 마당 가꾸기 같은 것들도 좋겠지요.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인식의 원천이 됩니다. 무엇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관찰하며 내가 이런 사람이기도 하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다양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능력, 상상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실제 결과물에 변화를 만들어내는 그런 상상력이 없다면 계획적인 표현과 자기만의 스타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표현 안에서 스스로를 찾는다는 것은 자신의 상상력 안에서 스스로를 찾는다는 말과 언제나 일치합니다. 내가 이루어 낸 것, 그리고 내게서 나온 것들로부터 나는 상상의 힘의 구심점, 내 상상력이 가진 리듬과 흐름을 알아봅니다.


59p

하나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서는 굉장한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며, 소재의 원천이 내면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곳으로부터 필요한 에너지가 나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글을 시작조차 할 수 없지요. 그래서 글쓴이아 어떠한 갈등을 겪고 있고 어떤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갈망과 행복을 원하는지가 주제의 선택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70p

자신을 안다는 것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떠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사람에 데 투사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는 것이이죠. 그리고 반대로 나에 대한 타인들의 투사를 알아차리고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이조이 말아야 합니다. 단단한 표면 같은 얼굴이 나닌, 진실하고 교류 가능한 감정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대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스스로를 잘 아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과는 다른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좀 더 살아 있고 세심하며 재미가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인식은 역시 소중한 가치인 것입니다.



96p

무대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타인들의 시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후 사적인 것이나 은밀함, 수치심에 대한 자신만의 뚜렷한 견해를 세울 수 있어야만 관객으로서 자신의 교양에 도움을 주는 행위를 했다고 말할 수 있지요. 그들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자기 안의 것들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비록 풍부한 지식은 있을지 몰라도 아직 교양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문화가 가진 종교적 요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그들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내적 입장을 표명한다는 심정으로 자신만의 목소리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페터비에리

#자기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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