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흰색과 미색사이 그 어딘가.

by 이수연

블로그에서 본 몇 문장이 좋아서 어떤 시인의 책을 두 번째로 구매했는데 방금 도착했다. 이름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중고로 샀는데 너무 정성스러운 문장이 앞에 쓰여 있는 사인본이었다. 이럴 수가. 사인본은 팔다니. (같은 작가인 주제에 중고를 사면서 이런 것을 탓해도 되나.) 나에게는 행운 같은 일이라 시인이 직접 쓰신 두줄의 문장을 바라본다.

두 번째 줄 문장이 '새로 배우는 일이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나는 오늘 무엇을 배웠는가.


남자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을 크게 실감하지 못하다가 한 번씩 크게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 지금 우리 집의 길이가 3미터 정도 되는 하얀 벽은 한 아이의 예술세계에 대한 존중으로 지난 세 달간 색색의 마스킹 테이프가 잔뜩 붙어있었다. (마스킹 테이프로 놀러 갔던 호텔의 주방가구를 만든다고 벽을 채워두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양해를 구하고 마음의 준비를 시켰고 오늘 아이들이 민호와 외출을 나간 기회를 틈타 오늘 아침 도착한 친환경 페인트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작업실로 내려가 전혀 쓰지 않고 잠자고 있던 납작붓을 하나 꺼냈다. 벽에 남아있던 투명한 테이프와 잔여물들을 제거하고 벽을 칠한다. 칠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닫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된 색상이 왔다. 몇 년째 늘 주문하던 그 브랜드인데. 분명히 웜화이트를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따뜻한 색이다. 이런. 칠한 부분이 노랗게 둥둥 뜬다. 조금 망설이다가 고민하지 않고 나머지 벽을 다 미색으로 메꾼다. 드문드문 칠해져 있을 때보다 조금은 덜 어색하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두 색은 확연히 다르다. 벽 위아래는 새하얗고 중앙 부분만 미색이다. 더 꼼꼼히 칠할까 하다가 그냥 내려놓는다. (예전 같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 칠했을 것이다.) 어차피 6개월 후면 나는 또 새로운 붓을 들고 집에 낙서자리를 메꾸고 있을 텐데, 정확하게 같은 색상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었고 이런 것에 너무 집착하고 애쓰는 내가 어쩔 때는 정말 싫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4일 정도, 아침 즈음에 꾸준히 뛰고 있다. 20대 때 5년을 아무 이유 없이 뛰던 때와 지금 달라진 것은 어플을 쓰고, 기록을 한다는 것이다. 뛰는 것 자체는 특별히 지치지도 수고스럽지도 않다. 아직 무릎이나 발목이 아픈 적도 없고, 조금 추워도 뛰다 보면 평소 절대로 나지 않는 땀도 난다. 덕분에 이번해는 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가는 것 같다. 무엇보다 식사량이 엄청 늘었다. 내가 작년에 얼마나 잘 못 먹는 상태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오늘 한강 근처 땅은 눈이 쌓여서 딱딱하다가 어느 부분은 말랑말랑하기도 한 이상한 촉감이었다. 날이 다른 날보다 따뜻해서 인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내일부터 일주일간 혹한 이라니, 오늘의 훈풍을 감사하며 천천히 뛰었다. 최근 며칠은 음악대신 팟캐스트를 들었고 마치는 말이 너무 좋아서 돌아오는 길에 그 부분만 세 번을 반복해서 다시 들었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팟캐스트에서 소개한 책을 또 구매해 버렸다.

레드빈 통조림을 호기심으로 구입해 보았는데 민호가 개봉해 두었길래 먹어 보았다. 약간 팥 같은 맛이 난다. 이런 서구적인 패키지 안에 기대하지 않았던 맛이 라니. 냄비 안에 남은 콩을 싹싹 긁어서 다 먹었다.


앙굴렘에서 바람북스 출판사에서 [내 어깨 위 두 친구] 프랑스판이 출판사 중앙에 전시되어 있다며 사진과 글을 보내주셨다. 분명히 수출이 되었다는데 세상 어딘가에 내가 쓰고 그린 책이 알아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일은 참 새삼스럽게 기쁘다. 그리고 넋을 놓고 있는데 반가운 카톡이 왔다. 오래전부터 막연히 팬이었던 작가님과 묶여서 그룹 전시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역시 작은 희망이라도 바깥으로 꺼내놓고 표현하면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분명히 힘이 있다. 나는 작년에 무심하게 '작가님과 묶여서 전시를 하게 된다면 우린 참 잘 어울릴 텐데요' 그런 말을 실제로 내뱉었기 때문이다. 카톡을 받고 힘이 나서 뭐를 전시하지? 뒤적거리다가 [내 어깨 위 두 친구]중 한 장면에 내가 써둔 글이 보인다.

-겨울에 친구들이랑 놀다가 어느 날 땅바닥이 말랑말랑 해지면 그때부터 봄이 시작되는 거였어!

147p.



이번 겨울은 많이 춥지 않았다.

그러니까 며칠 더 많이 추워야 아쉽지 않을 것 같다.


멀끔해지지는 않았지만 덜 흉한 미색으로 얼룩덜룩한 벽이 옆에 있다.

사실 흰색이면 어떻고 미색이면 어떤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나만 아는 우리 집의 이상한 색의 벽.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씩 조금씩 무언가를 채워가고 지켜가며 살아간다.

희망을 입 밖으로 읊조리면서, 나만 알고 보이는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keyword
작가의 이전글전등갓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