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전등갓을 닦았다.

by 이수연

도련님이 신년을 기념해서 점심식사 초대를 하셨다. 항상 한결같이 정갈하고 깔끔한 집은 여전하고 예쁜 그릇에 소고기에 큰 대접을 받았다. 그러다가 나는 주책맞게 일어나 새로 바꾼 예쁜 조명 위를 본다.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먼지가 조금 쌓여있다. 하얀 전등갓에 동그랗게 까만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 부드러운 디자인. 얘 참 이쁘게 생겼다, 중얼거리면서 물티슈를 한 장 뽑아서 꼼꼼하게 남의 집 전등갓의 먼지를 닦았다. 도련님집과 먼지는 참 안 어울리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인지 손이 먼저 나갔다. 새해 덕담을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도련님집에서 나와 돌아오는 길에 너무 달달한 게 당겨서 초콜릿을 몇 개 샀다. 돌아오는 길 반가운 얼굴을 동네에서 만나 잠시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와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먹어두길 잘했다. 몇 년은 생각만 하고 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낸다는 것은 상당히 체력이 소진되는 일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꾹꾹 눌러두었던 이야기를 두 시간 정도 했고 민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민호가 작업실로 잠시 간 사이, 아이들 자는 방으로 들어가 쓰러져 버렸다. 그러다 아이들 친구와 어머님의 전화가 와서 저녁 시간을 같이 보냈다. 진격의 거인, 라디오 방송, 말 한마디의 중요성, 갑자기 멀어지는 인연 그런 것들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홉 시 반이 되자 자리를 정리하고 아이들 친구는 돌아갔다. 그리고 밤늦은 시간 빈 식탁 위에서 물티슈를 꺼내서 알코올을 묻혀서 오랜만에 우리 집 전등갓을 닦았다. 구리색 전등갓 세 개를 꼼꼼히 닦고 걸어진 지지대를 닦고 몇 년 전 수녀원에서 비 오는 날 버린 식탁의자 두 개를 닦았다. 물티슈 두장이 금방 새까매진다. 자기 전 아이들을 한 번씩 안아주고 민호를 안아준다. 나는 이렇지. 속을 잘 꺼내지를 못하지. 우리는 매일 얼굴을 보지만 눈은 잘 보지 않았지. 조금씩 조금씩 묵은 때를 닦듯이 말을 꺼내보자. 나도 더 용기를 내볼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언제 그런 대추를 먹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