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읽었고 작년에 읽었고 올해도 다시 읽을 책
문학 부분의 책이 많이 늘어났다. 낮설지만 우선 정리를.
건강에 관한 책이 두 권 있다. ㅎ
C. S. 루이스 [기도의 자리로]
작은 책인데 두 번 읽었는데 또 가물가물 하다. 그래서 다시 꺼내서 2월에 다시 읽을 책에 껴두었다.
기록의 힘을 믿으므로 표시해 두었던 몇 문장을 옮겨본다.
주님, 사람들은 말하기를
제가 주님과 대화해도 답이 없으시니 모두 꿈이라 합니다.
혼자서 둘인 양 말한다는 것이지요.
절반은 맞는 소리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려는 말을 찾으려 제 속을 들여다보면 안타깝게도 샘이 말라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텅 빈 저를 보시고
들으시던 자리에서 내려와 제 축은 입술을 통해 호흡하시며
저도 몰랐던 생각을 깨워 말씀하십니다.
하여 답이 필요 없고 답하실 수도 없지요.
둘이 나누는 대화 같으나 영원히 주님 한 분이시며 꿈도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꿈입니다.
Poems (시집) 기도
34p
파스칼은 '하나님이 기도를 만드신 목적은 피조물에게 [어떤 일을 유발하는 존재]로서의 특권을 부여하시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그 목적으로 하나님이 기도와 물리적 행동을 고안하셨다는 말이 어쩌면 더 맞을 것이다. 그분은 미약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일의 경과에 기여할 수 있는 존엄성을 주셨다.
37p
하나님은 당신의 말을 지금 듣고 계십니다. 엄마가 아이의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 단순하지요. 그분의 영원성 때문에 생겨나는 차이라면 (발음하는 순간 이미 과거로 변해 버리는 ) 지금이 그분께는 무한하다는 것입니다.
49P
우리가 1) 그 사실을 (일반론이 아니라 현존하는 사실로) 인식하고 2) 그렇게 하나님께 알려지기로 자발적으로 동의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을 사물이 아니라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네. 우리가 베일을 벗은 것이지. 베일이 하나님의 시야를 가릴 수 있다는 말은 아닐세. 달라지는 건 우리니까. 수동적이던 우리가 능동적으로 변하는 것이네. 그저 수동적으로 알려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우리 쪽에서도 보여 드리고 말씀드리며 우리 자신을 내드리는 것이지.
하나님은 사람을 대하실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수준에 어느 정도 맞추어 주시네. 그 사람이 두드리면 하나님 안의 문이 열리지.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네)
53P
그러나 우리가 알려는 것은 완전할 때 기도하는 법이 아니라 지금 이 모습으로 기도하는 법이네. 기도를 '베일 벗기'로 본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이 답도 앞서 이미 나왔어. 정작 마음속에는 온통 B에 대한 갈망뿐이면서 하나님께 억지로 A를 열심히 구한다면 그야말로 부질없는 짓 아닌가. 그분 앞에 내놓아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우리 속마음 그대로'이니 말일세.
떠오르는 생각을 억지로 밀쳐 내다 보면 나머지 기도까지 다 망치지 않는가?
우리가 숨김없이 다 내놓으면 하나님이 지나친 부분을 알맞게 조정해 주신다네.
머릿속에서 속수무책으로 잡념에 짓눌릴 뿐이야.
질서가 바로 잡힌 사고방식은 기도로 구할 복이지
기도하기 위해 꾸며 입는 옷이 아니라네.
78p
두 가지 위험만 피한다면 알다시피 한낱 말에도 위력이 있다. 하나는 사소한 문제를 신파 조의 죄로 부풀리는 요란한 과장이고, 또 하나는 반대로 대충 얼버무리는 위험이다. 여느 누구에 대해 말할 때처럼 반드시 간단명료하게 직설적으로 말해야 한다. '속일 뜻은 없었다',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렸다', '홧김에 그랬다'라고 할 게 아니라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미움 같은 단어를 쓰라는 뜻이다.
이처럼 자신이 아는 결점을 꾸준히 직시하고, 변명 없이 하나님 앞에 가져가 진지하게 용서와 은혜를 구하며, 힘닿는 한 더 나아지기로 결심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치명적 결점도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85p
적어도 그들에게 몸자세를 어떻게 하건 기도가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고 속여야만 한다. 그들이 자꾸 잊어버리지만 너만은 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는데, 그들이 몸으로 무엇을 하든 그 영향이 영혼에까지 미친다는 것이다.
93p
게다가 공허하고 짜릿하고 경박한 쾌락도 습관이 되어 버리면, 물론 즐거움은 반감될 테지만 그것을 끊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다행히 습관은 쾌락에 그런 영향을 미지치) 그래서 무엇으로든 환자의 산만해진 주의를 끌 수 있고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도 가능하다. 이제 더는 그가 즐겨 읽는 좋은 책들 없이도 그가 기도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 잠자는 시간을 방해할 수 있다. 어제자 신문의 광고란으로도 충분해. 좋아하는 이들과 나누는 즐거운 대화만 아니라 따분한 주제를 가지고 잘 알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는 대화로도 그의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수 있다. 오랜 기간 하는 일 없이 놀고먹게 할 수도 있고, 밤늦도록 깨어 있되 법석을 떨며 노는 게 아니라 썰렁한 방에서 꺼진 불씨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게 할 수도 있지.
모든 건강한 사교 활동을 우리 뜻대로 막고는 그에게 그것을 대신할 그 무엇도 보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내 환자 하나가 여기 지옥에 와서 말한 것처럼 그의 입에서도 최소한 이런 말이 나올 거야. '이제 보니 나는 꼭 할 필요도 없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일에 평생을 날렸구나"
109p
양손에 짐이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 짐이 늘 죄나 세상 염려는 아닐 겁니다.
우리의 방식대로 그분을 예배하려는 조급한 시도도 때로는 짐이 되니까요.
내 경우만 하더라도 가장 단골로 기도를 방해하는 잡념은 중대한 내용이 아니라 잠시 후에 하거나 삼가야 할 일과 같은 자잘한 내용이지요.
171p
보다시피 나는 욥을 위로하던 친구와도 같네. 자네가 지나는 음침한 골짜기를 밝혀 주기는커녕 더 어둡게 하니 말이야. 그 이유를 자네도 알 걸세. 자네의 어두움이 내 어두움을 불러냈기 때문이지. 그러나 여태 쓴 말을 다시 생각해 보아도 후회는 없어. 내 생각에 어둠을 공유할 때에만 자네와 나는 현재 속에서 참으로 만날 수 있네. 서로 간에는 물론이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 주님과 공유할 때 말일세. 우리는 아무도 밟은 적 없는 길을 가는 게 아니네. 오히려 큰길에 들어서 있는 것이지.
좋아하는 영화이자 소설 [파이 이야기]에 주인공 소년이 유년시절부터 노출된 다문화 환경과 그것으로 인해 자기에게 '주어진' 종교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고민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 다양한 문화 환경에 놓여 이성을 가지고 정확하게 자신의 종교관을 고민하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파이는 조심스럽게 부모님과 자신의 경험을 근거해, 그 성향의 차이를 인지하고 절충하며 그 선을 긋는다. 나는 지금 나의 종교가 무엇인지 확실히 모른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나에게 종교가 있는지 물었는데 늘 그렇듯 나의 대답은 똑같다.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종교활동을 하고 어딘가를 가서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보다 나의 삶과 행동으로 증명하는 삶이 더 가치 있다고 믿고 있고 그렇게 살고 싶다.
기도를 한다. 밤에 자기 전에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모든 말들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작년에 나는 '아무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나 자신도 상처받고 싶지 않다'라는 말을 계속 반복했다. 올해 들어와서는 기도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졌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이야기하고 싶어 졌고 그렇게 아무도 듣지 않는 방에서 혼자 희망을 이야기했다.
민호가 결혼을 하고 몇 년간 나에게 자주 했던 말 중에 참 고마웠던 말이 있다.
'신이 아내를 정말 사랑하시는 것 같다. 아내의 기도를 다 듣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말을 자주 했었다.
민호의 그 말은 하나 둘 모여서 나에게 자기 암시가 되었는지 나는 어느새 그 말을 듣고는 '그렇지, 나도 그런 것 같다' 그런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왜 요즘에는 저런 천사의 말이 안나옵니까.)
나는 나약하고 호기심만 많고 한계도 많은데 계속 욕심만 많다. 이런 내 마음을 이렇게 라도 풀어내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재작년에 사서 작년에도 읽고, 올해 2월에 다시 펼쳐 본 이 책을 정리해 보며 오늘은 꼭 오래오래 감사하다는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거짓도 섞을 필요가 없다.
나는 지금 매우 기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