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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이월에 박준 [계절 산문]을 읽었다.

by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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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풀은 자란다] 중에서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는데 발고정이 불편해서 나무 책꽂이 하나를 가지고 와서 발밑에 눕혀 두고 읽으니 한결 편했다. 어제부터 눈이 왔고 길이 다 얼어주어서 이틀 동안 뛰지 못했다. 날씨 어플을 보니 이런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곧 눈이 다 녹고 성미산에는 연두색이 올라올 계절이 다가올 것이다.


그림책의 마무리 글을 다듬고 마지막 원고를 보내지 못하고 고민하다가 어제 반정도 남은 박준 님의 [계절 산문]을 다 읽었다. 오늘이 지나면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질 것 같아서 서둘러 아침부터 글을 옮겨 적는다. 아이들에게 앞 세장 정도를 읽어주었는데 나무 이야기 빼고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했다. 역시 아홉 살에는 브래드 이발사 같은 것이 최고지. 어제도 자기 전에 90페이지 한 권을 다 읽어주고 나오는데 목이 다 칼칼했다.



편집자님께 다소 급한 일정 속에 무리한 의견을 드렸는데. 노력해 주신다고 하셔서 기대해 본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아침에 '마음이 복잡할 정도로 행복하다'하는 말을 썼다. 오랜 시간, 너무 정신없이 일상이 지나가서 내 마음 하나 챙기기도 벅찬던 것 같다. 조용히 사과 한 알 꺼내두고 먹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고, 이렇게 책을 실컷 읽을 수 있는 상황도 감사하고 예전처럼 급하게 마음 쓰지 않아도 조금씩 진전되는 그림책 일들도 좋다. 무엇보다 내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입으로 꺼내고 글로 쓸 수 있고 기도 할 수 있다는 것, 이 상황이 참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마음이 더 평화로운 듯하다. 십이월 산문을 읽고 내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들과 닮아 있어서 반가웠다. 내가 바라고 그리던 것들, 희망이라고 말하고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들. 그것들이 그저 상상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아주 느릿느릿 천천히 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어떤 바람을 품어야 할까요. 그리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저도 마음의 바람과 삶의 현실과 인간의 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합니다.



17p

각자 내어놓은 답의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었지만, 재미 삼아 사전에서 '저녁'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녁: 해가 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 사전적 정의라고 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풀이를 보고 친구와 저는 동시에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저녁은 오지 않을 듯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지만, 결국 분명하게 와서 머물다가 금세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물론 저녁이 아니더라도 오고 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21p

입춘


온갖 무렵을 헤매면서도

멀리만 가면 될 것이라는 믿음

그 끝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29p

분명 당신은 그 장면을 반짝이는 눈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제 가자"하고 말하는 당신에게 지겨워도 살자고, 새로 살자고, 아니 그냥 지금처럼 살자고 조르고 싶습니다.



31p

선물


저는 그 잉크가 좋았습니다. 선물을 받은 일도, 계절이 지나는 산중 같은 잉크의 색도 좋았지만 제가 더욱 기뻤던 것은 그것을 제가 준 이가 문방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건네는 법이니까요.


그래도 시만 한 선물은 없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선배의 선물을 저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다가 조금 먼저 죽은 사람들도 받았던 것이겠고요.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다음으로, 시간을 살며 써왔던 선배의 시와 글들이 선배 스스로에게도 가장 좋은 것이었으리라는 말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은 좋아하는 이에게 좋아하는 것을 건네는 법이니까요.



37p

삼월 산문 -봄의 스무고개


여리고 순하고 정한 것들과 함께입니다. 살랑인다 일렁인다 조심스럽다고도 할 수도 있고 나른하다 스멀거리다는 말과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저물기도 하고 흩날리기도 하다가도 슬며시 어딘가에 기대는 순간이 있고 이내 가지런하게 수놓이기도 합니다.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잡으면 놓칠게 분명한 것입니다. 따듯하고 느지막하고 아릿하면서도 아득한 것입니다.


38p

과거를 생각하는 일에는 모종의 슬픔이 따릅니다. 마음이 많이 상했던 일이나 아직까지도 화해되지 않는 기억들이 슬픔을 몰고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즐겁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은 장면을 떠올리는 것에도 늘 얼마간의 슬픔이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켜켜이 쌓인 시간이 만들어낸 일이라 생각합니다. 숲이 울창해지는 일도 다시 나무들이 앙상해지는 일도 이러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41p

사는 일이 이상합니다. 마음에 저승 같은 불길이 일고, 그것을 손으로 비벼 끄다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느새 말과 행동까지 뜨거워져서는 어쩔 줄 몰라합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냅니다. 그러다 다시 지금 같은 깊은 밤이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마음의 빈 들판을 봅니다. 제게 주어진 밤이라는 시간을, 낮 동안 일어난 불길을 덮는 데에 온전히 쓰는 기분입니다.


45p

한계


너의 웃는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이제 그만

울어도 될 것 같습니다



53p

우리의 내밀을 제가 스스로 깨뜨린 것입니다.


59p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던 외진 곳

새로 푸르게 돋아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다 어제의 바람 덕분일 것입니다



63p

오월이 되면 덕수궁에 등꽃을 보러 가야지, 그 등꽃 아래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돌아와야지 하는 저만의 계획은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지난 오월의 시간을 다 흘려보냈습니다. 이제 막 오월이 지났으니 다시 새로 오월이 오려면 시간은 가장 추운 길을 지나야 할 것입니다. 이 슬픈 일도 함께 슬퍼해주셨으면 합니다.


67p

그때 저는 침묵도 부드럽고 다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침묵을 불편해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침묵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참 귀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어떤 말이 침묵을 닮았고 또 어떤 말은 침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요즘 저는 아무것도 아닌 날들을 이어 보내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꾸미기에는 조금 지쳤고 이미 꾸며진 일들에는 마음이 선뜻 닿지 않습니다. 이러한 닫음이나 닫힘이 좋은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냥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 정도로 경계와 반성을 대신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시간이 무엇을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뭉근한 침묵과 함께 말입니다.


95p

살아가면서 좋아지는 일들이 더 많았으면 합니다. 대단하게 좋은 일이든, 아니면 오늘 늘어놓은 것처럼 사소하게 좋은 일이든 말입니다. 이렇듯 좋은 것들과 함께하면 저는 은근슬쩍 스스로를 좋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101p

정의


사랑은 이 세상에

나만큼 복잡한 사람이

그리고 나만큼 귀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새로 배우는 일이었습니다


103p

막 국 수


다만 이때의 '막'은 함부로 혹은 아무렇게나의 의미가 아닌 편하고 자유롭게라는 의미에 더 가까울 것입니다.


105p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혹 상대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는 법도 없었습니다. 또 어느 때에는 보고 싶다, 만나고 싶다는 마음을 제 스스로에게조차 숨기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벗 없이 살아가는 일에 적응을 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일보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더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만나지 않는 일을 더 좋아합니다. 낯선 인연이 제 삶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떤 안온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품고 있기도 했습니다. 유배되고 유폐된 마음을 뚫고 들어올 인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 찾아올지, 찾아온다면 언제가 될지 헤아릴 수 없는 일이지만, 아마도 온다면 그 인연은 는개처럼 잦을 듯이, 혹은 어둠처럼 고요하게 올 것 같았습니다.


108p

사실 박목월 시인이 처음 [나그네] 초고를 썼을 때에는 남도 "삼백 리"가 아니라 "팔백 리"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퇴고를 하며 오백 리의 거리를 줄이게 된 것이지요. 너무 먼 거리감은 그리움의 정서를 오히려 반감시킨다는 것이 박목월 시인의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더해, 보고 싶은 이가 멀리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픈 마음도 있었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러니 저도 너무 멀리 계시다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111p

사람에게 큰 병은 힘들고 버겁기만 하지만, 감기나 몸살 같은 잔병은 나쁜 것만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잔병은 먼저 사람을 쉬게 합니다. 아프다고 해서 노동이나 학업을 작파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겠으나, 적어도 덜 중요한 일들은 하지 않거나 미뤄두게 되니까요.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마냥 무용하지는 않습니다.



118p

어떤 셈법


네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내가 칠만 원을 줄게. 너는 오만 원만 내. 그러면 십이만 원이 되잖아. 우리 이 돈으로 기름 가득 넣고 삼척에 다녀오는 거야. 네가 바다 좋아하잖아. 나는 너 좋아하고.


122p

고민을 더 깊이 가져가보면 아마 그런 약은 앞으로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또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떤 괴로움이든 그것을 충분히 다 괴로워한 후에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것일 테니까요.


126p

가족이나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때면 한없이 수다스럽다가도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굳게 닫았던 것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제 의견을 말하지 못할 때가 많으니 불편과 부당을 보아야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반면 장점도 있었습니다. 먼저 불필요한 말을 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필요한 말도 다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말까지 할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말을 내뱉지 못하는 침묵의 시간 동안, 자연스레 그 말을 머릿속으로 굴려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마치 한 번도 사랑 고백을 해보지 않은 영화의 주인공이 고백의 순간을 위해 혼자 이런저런 대사를 연습하듯 말입니다. 그만큼 실언으로 상대의 마음을 거스를 일도 적데 되었습니다. 해야 할 말이나 하고 싶은 말을 고르는 것은, 곧 그 말을 들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133p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자격은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만 가질 수 있으니까요. 빛과 비와 바람만이 풀잎이나 꽃잎을 마르게 하거나 상처를 낼 수 있지요. 빛과 비와 바람만이 한 그루의 나무를 자라게 하는 것이니까.


140p

하루의 해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우리의 생이 그러하듯이 삶을 살면서 맺는 관계들도 모두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거창했는데 끝이 흐지부지 맺어지는 관계도 있고 어서 끝나서 영영 모르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하는 관계도 있고 끝을 생각하기 두려울 만큼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관계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짧은 기간의 교류든 평생에 걸친 반려든 우주의 시간을 생각하면 모두 한철이라는 것이고, 다행인 것은 한철 동안 우리는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잘도 담아둔다는 것입니다. 기억이든 기록이든.



156p

크게 들이쉬었다가 이내

기침이 터져 나오는 겨울밤의 찬 공기처럼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갓 지은 밥을 공기에 퍼두었는데 반찬도 따로 상 위에 올렸는데 아직 그 사람이 도착하지 않았을 때, 그대로 언제라도 저 문을 열고 웃으며 들어설 것 같을 때, 그릇 뚜껑이나 보자기를 올리듯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고 네가 다시 그 말을 어떤 식으로 받아쳤으며 그사이 숨어 있는 잘못의 세목들, 이런 것들을 들추어 밝히는 대신 그냥 덮어두는 편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또 덮어두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마지막과 가 사람의 마지막을 같이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중간에서 그 사람의 마지막을 보거나 아니면 그가 중간쯤 왔을 때 나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습니다. 덮어둔다는 것은 어느 낮은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하는 것이고, 그곳으로 흘러오는 것들을 마다하지 않고 반긴다는 뜻이며 한참 세상이 지나 그 위에 무엇이 쌓였다 해도 변함없는 것들을 다시 찾아내는 일입니다.


160p

십이월 산문


어떤 일이 이루어짐은 그것을 바랐던 사람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삶이라는 것이 혹은 계획이라는 것이 늘 마음처럼 되는 것은 아니겠으나, 바람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루어진다는 말 자체는 성립되지 않을 테니까요.

어떤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나를 그 음식 앞으로 데려다 놓을 것이고, 어딘가로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나를 그곳으로 보낼 것입니다. 어떤 대상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은 결국 그 사람과의 만남을 부를 테고요. 그러니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들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들이 많다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역시 저의 바람이자 희망입니다. 그리고 믿음이기도 합니다.


환하게 열릴 한 해의 시간들 속에서 어떤 바람을 품어야 할까요. 그 바람은 어떻게 현실이 될까요. 그리고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꺼내게 될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마음의 바람과 삶의 현실과 인간의 말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멀지 않음의 힘으로 우리는 더 멀리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오래된 저의 바람입니다.



182p

번화


서로에게 번화했으므로

시간은 우리를 웃자라게 했습니다


번화하다 繁華하다

[번화하다]

1. 번성하고 화려하다. 2. 얼굴에 달기(達氣)가 있고 화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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