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나를 깨우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철학 에세이
소설가의 철학 에세이라.
히라노가 TED강의를 한 것도 보고 싶었는데 일본어의 한국 자막 파일이 없어서 결국 책을 샀다.
히라노 본인이 머리말에 언급한 대로 학자가 아닌 소설가의 철학 에세이 이므로, 본인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세심한 배려가 보이는 책이다. 주로 서양의 철학 서적 번역본을 읽다가 일본 소설가의 철학 에세이를 읽으니,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가 달랐다. 철학책이라고 해서 다 어렵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구나 또 새로운 것을 배운다.
신형철 님의 문학이야기 팟캐스트를 듣다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인터뷰가 끝나고 '분인'의 개념에 대하여 낭독해 주셨는데, 아침에 뛰면서 듣다가 멈추어서 그 부분만 세 번을 반복해서 다시 들었다. 왜 이 몇 문장에 나는 이렇게 위로와 힘을 얻는가? 궁금해졌다.
개인( 個人 )에서 분인(分人)으로.
individual의 구성은 in + dividual이며, divide(나누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dividual에 부정접두사 in이 붙은 단어다. individual의 어원은 직역하면 불가분,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의미이며, 이 말이 오늘날의 '개인'이라는 의미로 정착된 시기는 불과 얼마 안 된 근대에 접어든 후였다.
히라노가 쓴 소설들이나 언급되었는 일본 고전 소설들의 예시가 많이 나오는데 크게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분인 이라는 개념을 스스로 세우고 실질적인 근거를 예시로 들고, 읽는 이로 하여금 바로 이해할 수 있게 편안하게 철학을 이야기했다는 것이 참 좋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만적인가, 위선자인가, 강자에게 약한가 강한가, 약자에게는 친절한가, 태도를 바꾸는 나는 이중 인격자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할 때마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지금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인간은 몇 번씩 새로운 자아와 만난다. 아주 명쾌하지는 않지만, 이런 다양한 모습이 모두 통합되어서 그것이 바로 '나'이고, 자신이 좋아할 수 있는 분인의 자리와 빈도수를 늘려가는 것이 더 현명한 삶이라는 결론에서 위안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부분에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것 같다. TED강의 이후 한국인들의 반응이,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출판되게 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에게도 이 다양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일본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책을 읽으면서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었다. 동시에 '나 스스로가 마음에 드는 나'를 만들어주는 인연들과 자리를 귀하게 여기고 그 시간과 빈도수를 늘리는 인생을 설계해야겠다는 조금은 구체적인 계획도 생겼다.
23p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냈고 학교생활도 즐거웠다. 그런데도 이따금 문득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화제에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재미가 없다기보다 어딘지 모르게 충족되지 않는 느낌이라고 할까.
47p
인간에게는 몇 가지 얼굴이 있다. 상대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양한 내가 된다. 그것은 꺼림칙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나는 나라고 고집을 부린다면, 성가신 존재로 여겨질 뿐이고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유, 개인의 개념은 타자와 자기 모두를 부당하게 폄하하는 착각이며 실제와도 거리가 멀다.
우리는 누구와도 진정한 나로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 분인은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고 연기하는 게 아니고, 어디까지나 상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겨난다.
실제로 내가 할머니를 대할 때의 분인과 친구를 대할 때의 부닌은 오랜 시간에 걸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희로애락의 다양한 반응을 주고받은 결과다. 또한 이것은 고정적이라기보다는 가변적이다. 몇 변씩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말투나 표정으로 서로를 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일일이 가면을 바꿔 썼다느니 가면이 변모되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세 번째 이유, 타자를 대하는 여러 분인에는 각각의 실체가 있지만, '진정한 나'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것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86p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상대와의 개성 사이에서 조화를 찾아 내려하고, 그때그때마다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인격을 만들어 내며, 실제로 그 인격으로 살아간다. 그것은 엄격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커뮤니케이션이 성립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저절로 기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여러 인격으로 본심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언동에 감동받아서 깊은 생각에 잠기거나 인생을 바꿀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요컨대 그 여러 개의 인격이 모두 '진정한 나'이다.
89p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려면 계속성을 가지고 특정한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해가 떠서 저녁에 해가 지는 반복적인 주기를 살아가면서 주위의 타자와도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거듭해 간다. 인격이란 그런 반복을 통해 형성되는 일종의 패턴이다.
100p
사회적인 분인이 특정한 사람에게 맞춰서 형성되는 정도가 서로 알게 된 시간의 길이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102p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나만을 위한 인격을 발견하면 매우 기쁘다.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방식으로 대해 주는 데 크게 감동하는 것이다.
103p
분인화는 상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렇다 보니 왠지 모르게 싫은 사람과 있으면, 자기 자신까지 싫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104p
명랑하고 쾌활해서 누구나 금방 분인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분인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운 사람도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분인화한 후자 쪽이 오래 교제하는 경우도 있다.
분인은 상대에게 강요당하면 왜곡된 형태로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혹은 분인화에 거부반응을 드러낼 수도 있다. 일방통행으로는 절대 이뤄지지 않는다.
108p
중요한 것은 일단 유연한 사회적인 분인이 쌍방의 내부에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109p
누구에게나 수미일관된 나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한결같이 붙임성이 좋고, 몰개성적이며, 큰 지장이 없는 나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인 관계마다 과감하게 분인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다양한 특성이 발휘되는 나로 살아갈 수 있다.
어느 정도 분인 숫자를 안고 사는 게 자기 마음이 가장 편한가로 결정될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분인의 숫자에 맞춰서 실제로 사귀는 사람 숫자도 자연스럽게 조정된다.
121p
인간의 육체는 역시 나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자체는 여러 분인으로 나뉜다.
나라는 존재는 외따로 고독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기보다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진정한 나'라는 개념은 인간을 격리시키는 감옥이다.
145p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 분인으로 살아가기에 비로소 정신적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인간은 단 한 번뿐인 인생을 가능하면 다양한 나로 살고 싶어 한다. 대인 관계를 통해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나를 즐기고 싶어 한다. 언제나 똑같은 나로 감금되어 있는 것은 큰 스트레스다.
156p
그런데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분인이 좋다는 사고방식은 반드시 한 번은 타자를 경유한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는 역설이야말로 분인주의의 자기 긍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좋아하는 분인이 하나씩 늘어간다면, 우리는 그만큼 스스로에게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173p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상대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분인이 좋아서 그 분인으로 좀 더 살고 싶어진다.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그런 분인이 발생하고, 나날이 신선하게 갱신되어 간다. 그렇기에 서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이며, 그렇기에 한층 더 상대를 사랑한다. 상대에게 감사한다.
매번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어필하지 않아도 그러는 와중에 이미 서로의 존재 자체가 함께 가야 할 필연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의 내가 좋은가 아닌가? 그러면 저절로 대답이 나온다.
181p
파트너는 아주 비슷한 분인 균형을 가진 사람이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분인'이외의 분인이전혀 없는 사람 역시 교제하다 보면 숨이 막힐 게 틀림없다. 결국은 구성 비율의 문제다.
190p
당신이 고인과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다면, 당신 안에는 그와의 분인이 여전히 소멸되지 않고 존재한다. 그 분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인의 영향을 받는다.
207p
분인주의는 개인을 인종이나 국적이라는 보다 큰 단위로 조잡하게 통합하는 것과는 반대로 단위를 작게 만듦으로써 아주 면밀한 유대를 발견하게 해주는 사상이다. 우리는 마땅히 가까운 사람의 성공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분인을 통해 그 성공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마땅히 가까운 사람의 실패에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실패의 원인은 분인을 통해 우리 자신에게서도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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