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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포르노 그래피를 구매해 본 적이 없다.

한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

by 이수연

얼마 전에 한 학생분이 '작가님은 섭렵하지 않은 콘텐츠가 없군요.'라고 말해주셨다. 생각해 보니 나의 이야기 중독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한 것이라 기록을 제대로 해두었다면 굉장한 하드가 되었겠구나 생각이 든다. 만화책과 약간의 문학, 빠지지 않고 챙겨 본 주말의 명화들, 그림책에 빠지기 시작한 20대부터 다양한 책을 좋아하는 취향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그리고 아마도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렇게 이야기와 이미지의 세계 속에 평화롭고 행복한 나는 잘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가 섭렵하지 않은 콘텐츠가 하나 있다. 그건 사람들이 흔히 포르노라고 부르는 포르노 그래피를 구매해 보거나 일부러 시간을 내서 본적이 한 번도 없다. 어릴 적부터 성인 만화가 성인 만화인 줄 모르고 본 적도 있고 내가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모르고 받아들인 적은 있었지만, 내가 의도를 가지고 구매를 해서 시간을 들여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그 장르에 대해 내가 가지는 어떤 깊은 불편함이 있는데, 그걸 버티며 지켜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컨텐트 안에 나오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은 목적이 있고, 자신의 몸을 촬영하고 그 영상물을 판매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런 영상을 보고 소비하는 것이 그 콘텐츠를 만든 이의 목적대로 나에게 작동 되지를 않는다. 물론 그 영상과 나 사이에는 많은 레이어가 있어서 우리는 서로의 눈을 볼 수 없지만, 나는 그 모니터 속에 움직이는 사람이 실제로 살아있는 사람이고 지금도 어딘가에 나와 같은 하늘아래 있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고 불편하다. 조금 더 나아가 (이것은 범죄의 영역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귀었던 연인의 동의 없이 협박의 수단으로 리벤지 포르노를 올리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슬픔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이 느껴진다. 왜 인간이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가. 정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한 생명을 대해도 되는 것인가?


남자의 발기된 성기를 처음으로 잡아본 것이 일곱 살 때였다. 내가 원해서는 아니었고, 그 순간을 고통으로 기억하지도 않는다. 얼빠진 남자의 얼굴을 보면서 나와 동네친구는 깔깔깔 웃었고 우리는 그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오빠가 언덕을 넘어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주저앉아서 배꼽이 빠져라 웃었었다. 그 뒤로도 내가 대한민국에 치안이 조금 느슨한 동네에서 여자아이로 살았던 덕분에 나는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누군가 자신의 성기를 내 앞에서 흔드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는 놀랍지도 않을 정도로 많이 보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사춘기 때 가질법한 동년배 남자아이에 대한 환상이라던가, 호기심이라던가 그런 것은 모두 유년시절에 완전히 깨져버린 상태였다. 누군가를 첫사랑으로 짝사랑한다거나 그런 풋풋한 기억이 내 십 대 시절에는 없다.


내가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 영등포에는 학교에서 한 골목만 지나면 사창가와 술집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이상한 동네였다. 야간에 알바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정육점 색 조명들이 켜져 있고 여자들이 유리안에 전시되어 있는 이상한 거리를 지나갔다. 이상했다. 바로 앞에 백화점 사거리가 있는데 그 바로옆에는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팔고 있다. 그걸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분홍색 조명을 받으며 전시되어 있는 빼빼 마른 언니들 옆을 지나가면서 내가 사는 세계가 지나치게 무던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뚱뚱이 여인 베르타를 구경하는 심리는 선정적인 것을 찾으려는 심리다. 그리고 관객의 선정적인 시선은 여인 베르타의 존엄성을 강탈한다. 관객 앞에서 그녀는 괴물 같은 물체, 거대한 하나의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같은 기형적 신체라도 의과대학 수업에 등장할 경우에는 사정이 다르다. 이것의 목적은 배움과 교육에 있다. 그런데도 환자 중에는 이것을 존엄성의 상실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많다. "나는 전시되는 물건이구나, 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여인은 다시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얼마 후,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어느 기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 여전히 '전시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삶의 격, 만남으로서의 존엄성 중에서.


언젠가 보았던 트로피헌터 다큐멘터리에서 아빠 하마를 망설이지 않고 머리를 쏘아 죽이고, 그 시체 옆에서 사진을 찍는 헌터의 표정을 보았다. 그저 한 마리를 죽인 것이 맞을까? 그 하마는 함께 강물에서 수영을 하던 다른 하마들의 하나뿐인 부모였고, 가족이었고, 친척이었을 것이다.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주변에 있던 수많은 하마들이 흩어졌다. 그 순간, 그 하마들의 마음과 삶에서 커다란 중요한 무언가가 갑자기 상실된 것이다. 과시하기 위한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https://www.youtube.com/shorts/M-ThKORdMUU

https://www.youtube.com/watch?v=ImXV8sPa3rA


인간을 전시하고, 살해하는 것과 동물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이 과연 당하는 입장에서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간이라서 존엄하고 동물이라서 존엄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동물들이 우리가 느끼는 것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걸까?

아니, 인간 자체를 우리는 서로 진심으로 존엄하게 생각하기는 하는가?


그 어떤 것도 당연하거나 전혀 괜찮지 않다.


밀렵꾼에게 끌려간 고릴라가 '부모'라는 설정은 노래가사 속에 있지 않았다. 그 고릴라가 어떤 따뜻한 가족의 일부였고, 그들이 마주한 이별과 상실감, 존엄성이 파괴되는 감정이 모두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읽히기를 바라고, 상상하며 그렸다. 이 책이 동물과 인간의 감수성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오래오래 보여 지기를 꿈꿔본다. 어제 사인본 100권이 도착해서 큰 고릴라의 손가락과 아기 고릴라의 손가락이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이른 아침에 출판사 대표님이 오셔서 가지고 가셨고, 곧 마감되는 펀딩 해주신 분들께 우편으로 배송될 것이다. 작은 그림책이지만, 이 이야기가 가진 목소리가 부디 독자들에게 잘 전달되기를 바란다.

그들도 웃고 울고 허무하고 권태롭고 그리워하고 꿈꾼다는 것을,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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