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별명을 짓기에는 계속 발견하고 있어. 그래서 충분하지 않아.
학교 앞에 상자 몇 개가 놓여있고 노랑 병아리들이 가득하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작고 노란 동그란 새들에게서 눈을 떼지를 못한다.
한 마리에 200원이라. 이렇게 귀여운데 200원이라니.
나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서 병아리를 두 손에 조심스럽게 안고 집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온다.
병아리는 내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닌다. 내가 눈앞에 안 보이면 소리를 내어서 운다.
사랑스러운 병아리. 보송보송한 노랗고 따뜻한 깃털. 너무 지나치게 가벼운 병아리.
그 뒤로 며칠 병아리는 항상 내 옆에 있었다. 혼자 있던 집에 햇빛이 들어왔다. 병아리는 그 막대 같은 빛에 가서 앉아 꾸벅꾸벅 존다. 그 모습을 몇 시간이고 지루하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았다. 병아리가 힘이 너무 없는 게 아닐까? 아침에 학교를 가는 길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있는 병아리가 걱정이 돼서 동그란 빨래 바구니에 넣어 이불을 덮어주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가 오기 시작했다. 우산도 없이 배가 아프도록 내내 뛰었다. 혼자 집에서 천둥번개가 치면 무서워할 병아리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빨래 바구니를 열어보았다. 병아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삐약거리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렇게 쉽게 죽는다고? 이렇게? 믿을 수 없었다. 계속 울었다. 몇 시간이고 울었다. 옆집에 살던 이모가 시끄럽다고 찾아오셨다.
-다시는 병아리 같은 거 사 오지 마. 이렇게 울 거면 왜 사 왔냐.
맞아. 다시는 병아리 같은 거 사지 말아야지.
귀엽고 사랑스럽고 손에 잡을 때마다 불안할 만큼 가볍고 약한 것일수록, 더 가지려고 하지 말아야지.
그러다가 너무 마음에 들면 큰일이니까.
갑자기 없어지면 온 마음이 다 아프니까.
갑작스럽게 그렇게 사라지면 나는 버티기 힘드니까.
어른이 되고 나서 한 번도 반려동물을 사지 않았다.
나에게 반려동물을 산다는 것은 죽을 때까지 함께 있겠다는 뜻이다.
항상 동물을 좋아했지만 한 번도 반려동물을 집으로 가지고 가겠다는 용기는 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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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북이요?
거기에 뭐를 그리는 거죠?
-그냥, 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
-떠오르는 모든 것이요?
-그래. 그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떠오르는 모든 것을 그려 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다 그려서 어떻게 책을 만든다는 것인가?
나는 글을 써본 적도 없는데, 전화할 때 노는 손이 만드는 그런 엉망진창 낙서를 하라는 건가. 사소한 낙서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것으로 어떻게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걸까?
1년이 지났다. 나는 1년 동안 만든 습작 스케치북을 무심코 넘겨본다. 단순하게 시킨 대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그려보았다.
그것들이 내 안에서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모른 채.
붓을 들고 많이도 망치고 가끔씩 스스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도 하면서 무언가를 흰 종이 위에 쏟아내려고 시도해 보았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을 다 표현해 보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어떤 것은 시작도 못했고, 어떤 것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린 것도 있었다. 몇 개의 가득 찬 습작 울퉁불퉁한 정리되지 않은 스케치북들, 그게 내가 얻은 전부였다.
이게 어떻게 이야기가 된다는 거지? 이런 낙서를 모아둔 것들이.
일 년 동안 낮이고 밤이고 실컷 그림을 그렸지만, 나는 무언가를 더 명확히 알게 된 것인지, 아니면 더 혼란스러워진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스케치북 한 장에 시선이 멈춘다.
왜 이렇게 새를 반복해서 그린 걸까?
다른 것들도 물론 실컷 그리기는 했다. 어린 시절 자주 맞았던 비라던가, 자주 찾아갔던 놀이터, 담벼락 너머의 작은 숲, 동네의 골목, 어린 시절 키우던 개, 재개발로 사라져 버린 동네. 어린이 그림책을 만들려면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진 기억들은 모두 어딘가 일그러지고 그림자가 져있다. 이런 그림들이 어떻게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나의 욕심 아닐까?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노랑새를 자꾸 스케치북에 여러 번 거듭해서 그렸는지 알지 못했다. 잉크는 밝은 햇살 같은 오렌지 빛이 도는 노랑이었다. 회색 빛이 도는 푸른 도시 위로, 낡은 집들 위로, 때로는 소녀의 얼굴 위로, 손 위로 노란 새들이 날아다녔다. 몇 권의 스케치북에 꽤 많은 페이지에 같은 색의 잉크로 선이 없는, 면으로만 채워진 잠시 스쳐 지나가는 빛과 같은 흐리고 진한 노랑새 들이 여러 마리가 흩어져 있었다. 왜 이렇게 그린 걸까?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몇 년을 그 낙서들을 덮어두었다.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 뒤로 몇 년 후에, 나의 두 번째 창작 그림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여전히 여러 가지 물음표가 떠오르는데, 아직 나도 나의 이야기들에 충분한 답을 내지 못했고 자신감도 없었다. 인내심 많은 편집자님들의 도움으로 겨우 겨우 책을 끝마칠 수 있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무언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이 자꾸 망설여졌다. 내 이야기는 흔히 말하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그런 이야기는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어떤 ‘꿈’과 ‘희망’이 이렇게 어둡게 푸르고 회색빛으로 그려진단 말인가? 이런 그림자 같은 이야기들이 어떤 힘을 낼 수 있을까?
어느 날, 동네 마트에 갔고 거기에서 노랑새를 한 마리 만났다.
노랑새는 맹렬하게 해바라기씨를 먹고 있었고 그 모습이 씩씩해 보였다. 그러다 얼굴을 들고 나를 보았는데 내가 자리를 옮기자, 내 쪽으로 좁고 기다란 새장 안에서 다다다 다다 자리를 옮겼다. 내가 착각했던 걸까? 나는 반대쪽으로 몇 걸음 걸어보았다. 또 새장 안 노랑 새가 내가 가는 방향으로 다다다 다다 따라왔다.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새의 코 위에는 이상할 만큼 커다란 누런 코딱지들이 덮여 있었다. 나는 어딘가 많이 아픈 것이 분명한 그 새를, 마치 초등학교 앞에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여자아이처럼 충동적으로 사서 데려왔다. 그 새가 나를 바라보고 몇 걸음 두 번 움직였다는 이유만으로.
삼 년째였다. 새로운 그림책을 만들지 못한 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사실, 그림책이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난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을 사서 모은 걸까? 그 시간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지금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기는 한 걸까? 내가 가진 어두운 기억들이 모여 만들어진 책들이 과연 누군가에게 읽히고 공감을 받을 수는 있는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자신감이 없었다.
2015년에 편집자님들에게 기대어 겨우겨우 마무리했던 두 번째 그림을 펼쳐 본다.
욕심이 많은 멧돼지 부인은 이미 집을 가득 채울 만큼 그릇이 많은데도 새로운 그릇장을 짜고 싶어 한다. 주인공 곰 영업사원은 새로운 그릇장을 채워 넣자 더 어두워진 방에서 난감하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일인 가구를 팔 뿐이다.
그러다가 나는 보았다.
멧돼지 부인의 어두컴컴한 답답한 집 한구석에 노랑새 한 마리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는 것을.
회색과 푸른색이 가득 찬 그림 속에서 작은 노랑새 한 마리만이 이질적으로 떠 있었다. 그때 나는 왜 이걸 그려 넣었던 걸까? 이 장면 꼭 필요한 요소도 아니었고, 어떤 상징도 없었는데, 왜 또 하필 노랑 새를 이 장면에 그려 넣은 걸까?
노랑 새는 그림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한번 더 등장한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 곰사원에 집에 멧돼지 부인과 함께 놀러 간다. 그리고 곰의 어깨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다. 새장 안에 있지 않았고, 파티를 즐기고 있는 듯, 표정도 앞과는 달라 보였다. 나는 왜 이렇게 그렸던 걸까?
시간을 따져본다. 이 그림책이 출판된 것은 2015년이었다. 더 길게는 2010년, 나는 대학원 습작 스케치북들에도 여러 장 잔뜩 노랑 새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내가 노랑 새를 마트에서 만나서 사게 된 것은 2016년이었다. 그것은 내가 계획하거나 의도한 일들이 아니었다. 그 새는 지금 2025년, 10년째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세 번째 창작 그림책이 나오기 전 5년 동안,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했었다.
그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하얀 종이 위에 그린다는 것.
그리고 글자로 쓴다는 것.
그것이 도대체 무슨 힘이 있기는 한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정성을 들여서 이런 일들을 10년이 넘는 시간을 쏟아붓고 있는 걸까? 내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사소한 기억 들이 과연 이야기가 될 수나 있는 걸까? 나는 되지도 못할 무언가를 끝없이 희망하는 그냥 바보인 걸까? 어떤 결과물도 만들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러다가 오래된 스케치북을 다시 들춰본다. 두 번째 그림책을 다시 넘겨본다. 나는 내가 남겨둔 어떤 ‘일정한 흔적’들을 하나 둘 찾아본다. 새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새를 그렸고, 그것이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자기 치유에 대한 글을 쓰다가 노랑 새를 내 한쪽 어깨 위에 트라우마에게 말싸움을 거는 강한 존재로 얹어 두었다.
작년에 파라텍스트 갤러리에서 내 예전 스케치북 습작을 액자에 넣어 판매를 했었다.
여자 아이 둘이서 날아가는 노랑 새를 손을 뻗어서 잡아 보려고 하는 그림이 팔렸다.
- 왜 이 그림을 선택하셨어요?
- 저 노랑 새가 ‘영혼’으로 보였으니까.
살아있는 영혼이 그림 속에서 날아다니고 있는 것으로 보여서 그 그림을 선택했다고 하셨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그려 넣어둔 것뿐인데.
나는 거기에 무엇을 그려 넣었던 것일까.
‘영혼’이라는 것이 그려지고, 눈으로 보여지는 게 가능한 일인 걸까?
나는 정말 그분의 말대로 나의 ‘영혼’ 한 방울을 노랑 잉크에 타서 푸른 잉크 위에 뿌렸던 걸까?
오늘도 나는 무엇인가를 이렇게 글로 더듬더듬 적어내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이 ‘희망’하라고.
빈 종이 위에 더 많이 무엇인가를 그려내고 빈 페이지에 무언가를 써내라고.
그것은 시간은 아주 오래 걸렸지만, 놀랍도록 무섭게 내 옆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마음속으로 읊조리는 말, 그렇게 드는 생각을 입 바깥으로 꺼내보는 것, 그게 내 귀로 들어오는 것, 그리고 손이 움직여서 무언가를 끄적거리며 대충이라도 알아보게 그려보는 것, 그려진 것을 다시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단어’로 바꾸어서 혼자서 다시 중얼거려 보다가 이렇게 빈 페이지 위에 어설프게나마 글로 적어내는 것. 그 모든 것은 거미줄처럼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끈질기고 단단하게 내 안의 무언가를 낚아채고, 내 삶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요즘 나는 누군가를 만날 때, 함부로 원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문장을 만들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그런 말을 무심코 내뱉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희망하고 중얼거리고 무언가를 쓰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의미 없어 보이는 많은 것을 내 삶에서 하나 둘 무심하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지금은 정확하게 알지 못하더라도, 망설이지 않고 더듬더듬 채워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