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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붙잡기

by 이수연

아무도 안 올 수도 있으니까 혹시나 해서 노트북을, 빈 A4용지들과 연필을 챙겼다.

혼자서 몇 시간 동안 러프 스케치를 할지도 모르니까.

아이고. 그런데 두 분이 와주셨군요. 감사해요. 저는 이제 말을 멈추기가 힘들어지네요.

계속 질문을 할 거니까요.




이야기의 배경은 바다고 섬이다.

그런데 그 섬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아무도 정하지 않았는데.

그럼 한번,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섬을 상상해 볼까요?


섬의 가장 높은 산은 소라껍데기처럼 말려들어가고, 그곳에 사는 소년은 그 섬의 꼭대기까지 올려가지 않는다. 왜냐면 섬에서 지내는 동안, 소년은 자신의 섬에 숨겨진 신비를 한눈에 다 담는 것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소라껍데기 모양 높은 산은 안쪽으로 무지개 빛으로 파여 있다. 그곳을 올라서 더 안쪽으로 파고들지만, 소년은 혼자 사는 섬의 전체적인 모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못한 것이 아니고 선택한 것이다. 흥미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섬을 벗어나고 나면 그 섬의 가장 높은 산이 자기가 들고 불었던 소라 껍데기 나팔과 닮았다는 것을 그때야 눈치채게 되겠지.

누군가에게 소리를 울려 보내고 싶어서 들고 불었던 소라껍데기와

자신이 살았던 그 산이 닮았다는 것을 그때야 보게 되겠지.



소년의 귀는 커야지. 커야만 하지.

소년은 잘 듣고 싶으니까. 자신의 고독한 섬 바깥소리는 다 담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동물 귀 같이 그리면 안 되겠어. 잘못 보면 쥐소년 같으니까.

옆얼굴을 보여주세요. 사람의 귀는 안 보면 잘 못 그리겠어요. 어렵게 생겼거든요.


옷을 입어야 할까요?

나뭇잎 옷은 아담과 이브 같을까요?

팔에다가 갭을 그려 넣을까요?

문명이 섬까지 떠내려 왔으니까 갭 티셔츠가 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요.


구형 블랙베리는 어떨까요?

총천연색 알록달록한 섬에 까만 블랙베리가 흘러오는 거예요.

소년은 그것을 보는 순간, 무엇을 상상했을까요?


이거. 너무 문명, 비문명 세계 이렇게 나눠버리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하고 싶은 진짜 주제는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만남'에 대해 더 이야기해 봐야죠.


그럼 중요한 소녀,

소녀의 얼굴이 꼭 처음부터 보여야 할까요?

안개처럼 구름처럼 뒤덮여 있다가

눈물을 흘리면 얼굴이 조금씩 보일까요?

안경을 썼다가 눈이 밝아지면 그때 안경을 벗을까요?



처음에는 아이의 몸에 딱딱한 정장을 무리하게 입고 건너오죠.

그러다가 이야기의 끝에서는 옷도 키도 변해 있는 거예요.


만남을 통해 소녀는 성장했겠죠.

어떻게 그 성장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글로 그림으로?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하지 말고,

어떻게 지금까지는 없었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와.

앞으로 고민할게 산더미네요.


안개처럼 흩어져 버리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을 붙잡아 봅니다.


그런데, 이것은 늘 혼자 하는 고독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세 사람이 함께 하는 놀이가 될 수 있는 거였군요.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들.

고마워요.

이런 게 가능할 수 있다니.

저는 소년 보다 일찍 더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느낌이에요.


두 분은 어떤 셨나요?



오늘 밤, 더 많은 걸 상상하고 꿈꾸고

또 흩어지기 전에 붙잡아 봐요.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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