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키비움 J 10호, 그림책은 집에 실린 에세이

by 이수연

라키비움 J 10호 : 그림책은 집에 무려 10페이지가 실린 @gilbutkid_book 길벗어린이 출판사와 함께 작업한 [비가 내리고 풀은 자란다] 에세이 중에서 부분을 공유합니다. 표지는 @soobook2 한솔수북 출판사의 [커다란 집]으로 꾸며졌습니다. 수고해 주신 @larchi_j 편집팀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양한 실험으로 얻어진 ‘예측할 수 없는’ 수채화 기법]

이 책의 그림을 그렸던 시기는 14년 전 대학원 시절이었다. 끝도 없는 습작으로 나만의 수채화 기법을 발견하겠다며 ‘비’를 가장 적절한 소재라고 생각했고, 주제와 이야기도 없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장면을 모두 스케치북에 담아냈다. 종이에 빗물 자국이 스며들지 않고 그 위로 또르르르 흘러내리다가 그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종이 위에 니스와 투명 매니큐어를 바르고 OHP 필름지를 살짝 붙여본다. 그렇게 투명한 레이어를 만들고 그 위에 하얗고 푸른 빗물을 마음껏 그리면, 그림과 필름지 사이에 빗물과 함께 옅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내가 손으로 그려낼 수 없는 비 그림자가 스캔할 때마다 무작위로 다른 농도로 얻어졌다. 어느 페이지에서는 방금 꺾은 나뭇가지의 향처럼 짙은 풀 향기가 나기를 바라면서, 길에 떨어져 있던 나뭇잎을 말려서 붙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끊어진 장면들을 반복해서 그리고 또 그려냈다. 스케치북을 몇 권을 채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림은 모두 흐릿했던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비를 그리면서 정말 즐거웠다. 손가락의 긴장을 풀고, 잘 그리는 것보다 편안하고 자유로운 감정을 담는 것에 집중했다. 작가의 말에도 적었지만, 그림을 그리다가 지칠 때마다 나는 이 책을 책장에서 꺼내 보게 될 것 같다. 이 풋풋한 초록의 기쁨들이 엮인 책을.

많은 양의 습작과 들인 에너지에 비해 이 책에 대한 출판사들의 의견은 부정적이었다. 아이 둘이서만 폐허가 된 맥주 공장으로 놀러 간다는 것이 다소 위험해 보인다는 의견과 주제가 뚜렷이 드러나지를 않는다며 우려를 표했다. 당연했다. 이렇게 많은 습작을 그려내면서도 나조차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한 줄로 써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출판사들의 혼란이 지금은 이해가 된다. 그때의 나의 미숙함이 얼마나 다행인지. 지난 14년간, 이 그림을 바라보는 나의 눈과 마음이 많은 변화가 있었고 이제는 조금은 더 편안하게 풀어내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품고 있는 ‘도망쳤던 숲’, 그 안에서 들풀처럼 성큼 자라나는 아이들]

나에게는 이 책에 그려진 숲은 보이는 그대로 초록의 숲, 그 자체가 아니다. 공장 옆 오동나무 숲은 책에 그려낸 만큼 크거나 웅장하지 않았다. 어떤 리뷰에서 이 그림책을 ‘천 개의 초록’이라고 써주셨다. 나는 왜 이렇게 깊은 초록을 담은 숲을 그려내야 했을까? 나에게 숲은 어른이 되고 나서 뒤돌아본 어린 시절의 끝을 모르고 뻗어가는 한없이 커다란 희망이자 꿈이기 때문이다. 길벗어린이에서 2024년 4월에 출간된 [어쩌다 보니 가구를 팝니다]에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곰사원에게 성실하고 우직하게 자리를 지켜내는 개사원이 이런 말을 한다. ‘모두가 다 꿈을 가지고 그 꿈대로 사는 건 아니야. 누군가는 이렇게 나처럼 살아가.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지켜나가는 것도 꿈을 꾸는 것만큼 아름답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아.’ 우리는 숲 안에서 자유롭게 뛰어놀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커버렸고, 그러다 무언가를 놓치고 포기하며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살다가 어떤 날, 아, 어릴 때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쉬움과 쓸쓸함을 안고 뒤돌아보는 날들이 있다. 그러다가도 지금의 내 자리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곳으로 오기 위해 그런 싱그러운 초록의 꿈이 있었던 것이라고 웃음 짓는 평화도 있다.


비 오는 날을 싫어했던 새침한 아이는 처음에는 비 내리는 하늘을 보지 못한다. 눈에 빗물이 들어가는 것이 지저분하고 싫다. 그런 아이가 무릎에 진흙이 묻어도 참아내며 첫 번째 담당 속으로 기 어 들어가며 모든 일들이 시작된다. 더럽고 불완 전하며 꺼려지는 현실. 슬픔과 고통이 따라올지라 도 그 현실을 무릎으로 디뎌내며 부딪히는 소녀의 모습은, 순수함 만으로는 얻어낼 수 없는 아픈 성 장의 과정이다. 담장 속 세상은 낯설고 신비롭고 때로는 무섭기까지 하다. 그곳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 냄새 맡고, 듣고, 깨닫게 되면 서 소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다른 아이가 된다. 유년시절의 모든 순간에 누군가 항상 옆에서 아이를 지켜줄 수는 없다.

나의 어린 날은 항상 유쾌한 기억으로 채워져 있지 않았다. 어떤 날은 예민한 내 감정과 기억이 차 라리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사 건은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이 대신 겪어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최근 아이들이 학교에서 데리고 온 소라게를 키우면서 탈피하는 과정을 지켜보았 다. 안타깝게도 몇 달을 함께 살았던 소라게는 탈 피를 성공하지 못하고 껍질에 갇혀서 죽고 말았다. 성장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와 연약한 맨살을 드러내는 것이구나. 그렇게 절실한 고 위험한 거구나. 위태로운 동시에, 그 순간이 가 장 큰 기회인 것이다. 다른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 참 쓸쓸한 일이지만 어떤 성장은 온전히 혼 자서 부딪히고 상처가 나는 순간들에서만 생기기 도 한다는 것을, 인생은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른이 된 지금 조금씩 조금씩 배 워 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조금은 위태로 워 보이는 두 아이의 모험을 기쁘게 응원해야 한 다. 모험을 끝내고 돌아온 소녀는 다시 비가 오는 날에, 더 이상 겁을 내지 않고 휘휘 돌아가는 검은 하늘을 똑바로 지켜볼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눈 빛과 힘으로. 비가 내린 후 훌쩍 자라난 들풀처럼,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 성큼 자라나 버린다.


큰 용기를 내어 앞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디딜 때, 옆에서 발걸음을 맞추어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었 이면. 어떤 방향도 정해지지 않은 길에서 편한 신을 신고 걸으며 눈에 닿는 모든 풍경을, 하늘과 구름, 길, 스쳐 지나가는 바람, 나뭇잎과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크고 작은 새집. 그런 것을 바라볼 때 어떤 생각이 드는지, 그 작은 마음의 움직임, 그 시작과 끝이 무엇인지. 특별한 쓰임새도 없는 단 어들, 그런 사소한 것이 궁금하고 기억을 함께 붙잡고 싶어지는 참 귀하고 드문 대화. 외로운 우리 의 날들에 어쩌면 그 접점의 순간만이 반짝하고 짧게 빛을 내는 것이 아닐까? 진실한 대화를 나눈 다는 것은 서로 안에 잠자고 있던 작은 돌을 소중 하게 매만지고 닦아 빛을 내는 일이다. 그러다가 그 빛이 너무 따뜻하고 포근해서 계속 그저 파묻혀 있고 싶어진다. 계속 닿아있으면 서로 닮아지 기라도 할 것처럼. 때로는 그게 정을 쪼는 것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라 소라게의 탈피처럼 위 험하고 실패도 따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변 화를 피하기만 한다면, 충만한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헛되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빗물처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가는, 무지개처럼 다양한 빛을 내는 무한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충만한 시간을.


나는 자연과 동물에 대한 사랑과 개인적이고 내면 적인 것. 그것을 나누며 변화하는 감정과 성장에 늘 끊임없는 호기심이 생긴다. 내년에는 길벗 어린 이 출판사와 현대인의 고독과 외로움, 회복을 이 야기하는 그림책을 기획 중이다. 책을 한 권 마무 리할 때, 내 인생의 큰 질문들이 하나씩 서툰 대답 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대화가 깊은 위로가 되어 주고 있다. 14년 전에 해결되지 않았던 질문이 [비가 내리고 풀은 자란다]로 나름 의 답을 얻은 기분이다. 또 새로운 질문을 하고 나 만의 대답을 천천히 찾기 위해, 다음 걸음으로 시 선을 던져 본다. 그렇게 부지런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를 희망한다. 후회를 남기지 않고 충분히 만족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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