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최근에 마무리한 그림들을 싸서 충무로로 갔다. 어딘가를 오래 걷겠다고 작정하고 간 것은 아니어서 늘 그렇듯 코트에 로퍼를 신고 갔다. 날씨가 생각보다 맑아서 갑자기 안 가던 길을 오래 걷고 싶었다. 촬영 소요 시간을 넉넉하게 체크하고 스튜디오 근처 남산 한옥마을을 가로질렀다. 남산 둘레길을 타다가 지난가을에 잠깐 갔던 남산타워를 몇 달 만에 한번 더 보았다. 평일 오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는데, 날이 좋아서 기분이 상쾌했다. 스튜디오로 시간 맞춰 내려오느라 서둘러 내려왔는데 둘레길 울타리에 누군가 목도리를 하나 걸어두고 갔다. 아마도 더워져서 땀을 식히느라 머플러를 잠깐 풀었다가 잃어버린 것이겠지. 평생 목도리나 우산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만원도 안 주고 산 검정우산을 십 년 넘게 부러질 때까지 쓴 적이 있다. 울타리위에 펼쳐져있는 회색 머플러를 잃어버러니 사람은 지금 저것을 찾고 있을까?
촬영 스튜디오 작가님이 내 그림과 샤갈, 조선시대에 달마도를 그렸던 김명국 화가의 유사한 점을 찾아주셨다. 내가 스케치를 하지 않고 바로 붓으로 필력 있게 그려내는 것에 대해 짚어주셨는데, 단순하게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시작했던 점도 있었다. 이게 알게 모르게 나의 스타일이 되어가는 것이다. 선을 미리 그어두면 긴장하게 되는 게 싫었다. 아무것도 없는 종이에 기준이 없는 흰 여백에 바로 색을 채워가는 것이 가장 스트레스가 적었다.
이 일을 계속하게 되면서 매일 더 섬세하게 찾아가는 것은 내가 가장 힘들지 않고, 가능하면 기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게 항상 어떻게 그렇기만 할까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몸을 쓰는 일인지라, 그날의 수면상태에 따라 확실히 매일 그림의 결과가 달라진다. 그럼에도 조금 더 재밌게 즐겁게 하고 싶다. 괴로워하며 이 일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다.
얼마 전 새해가 되자 오랜만에 안부전화 몇 통을 받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람은 나에게 '잘 자고 있는지?, 어젯밤에는 잘 잤는지?'를 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나를 갑자기 찾아왔던 제자도 늘 나의 잠을 제일 먼저 묻는다는 것, 나에게 보낸 짧은 글에도 항상 잠에 관한 글이 쓰여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까지 바보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 질문이 얼마나 다정한 것인지. 나에게 정말 관심 있는 사람들만이 건네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좀 쓰여서'라는 말로 시작한 장문의 문자처럼. 어떤 메시지는 그냥 전자텍스트일 뿐인데도 나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카톡으로 대화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럴 때 보면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같은 매체도 완전히 다른 인상을 온기를 전해 받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람들이 듣고 싶은 것을 짚어주었을까? 그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같이 보아주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거 참 어려운 건데. 어떻게 그렇게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까. 진지하고 다정한 질문 덕분에 나는 오늘도 조금 더 사랑을 하는 방법을 조금 베운다. 모르는 게 너무 많기 때문에 아직도 매일매일 배우고 있다.
지난해 그리워하다, 그리움에 대해 한 작가님이 그것이 그림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언급한 것을 보고 생각했었다. 우리는 어쩌면 원하고 바라는 것을 그리고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둘레길 울타리에 남겨져 있을 목도리 생각을 한다. 자주 쓰고 오래 손때를 탄 것이라면 잃어버린 사람은 오래 눈에 밟히겠지. 미련이 남을 것이다. 차라리 익숙해지기 전에, 정들기 전의 새것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렇게 무심하게 잃어버려도 덜 그리울 테니까.
이번해 들어와서 시력에 변화가 오고 있다. 작년부터 옆머리에 흰머리가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다. 원래 시력이 좋지 않아서 늘 늘 시야가 흐렸는데 그래도 안경을 쓰면 괜찮았는데. 최근에 작업을 하다가 답답해서 안경을 몇 번이나 벗었다 썼다가 했다. 이렇게 갑자기 오는 거구나. 인간이 나이가 들면 눈과 귀를 어둡게 만드는 것인가에 대해서 누군가 '세상에 대한 애착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글을 쓴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떠올려 보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소리도 냄새도 온기도 점점 흐릿하다. 흐릿한 눈으로 오늘따라 먼지 없이 맑은 하늘아래 있는 서울을 산 위에서 본다.
조이가 지금 옆에서 목탄 워크숍을 마무리하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아무 말이나 막 적고 있다. 조이와 인왕산에 봄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작년에 처음 만났을 때, 내가 500개가 넘는 그림 중에서 한 장을 선택한다면 당신의 그림을 샀을 거라고 말했을 때 조이의 눈빛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에도 없는 그런 소리, 잘하는 사람이 아니지. 조이와 이렇게 일 때문이라도 정기적으로 만나게 돼서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