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어와 말미잘

업그레이드는 있어도 다운그레이드는 없어

by 박승연


10대에는, 사방으로 몰려드는 모든 압박을 견뎌내기에도 부족했다. 시키지 않아야 흥미가 생기는 인간에게는 대한민국의 교육환경은 하드카운터.


지금이야 아무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니, 항상 어제의 나와 싸우며 뭔갈 더 해볼까. 하던걸 더 잘해볼까. 이런 고민을 하면서 살아감에 행복하다.


한 가지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다.

올라간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만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자원의 한계건,

신체적 한계건,


지금은 풍족한 자원, 시간, 신체적 내구도로 인해 올라서는 것에 포기함이 없다. 다만 어디에 집중할 것인지에 따라서 일부 양보하게 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마저 아쉬움을 느낀다면, 앞으로는 어찌하면 좋은가.



고등학교 시절,

어쩌다 한번 스타벅스에 들리면 그리 신이 났었다.

점심 한 끼니가 육천 원이면 충분했기에,


한 잔에 오륙천 원 남짓 하는 음료 한잔은

특별한 날 맛볼 수 있는 선명한 사치였다.


물론 내 돈 주고는 못 가는 무시무시한 곳이었고,

음료 한잔 쿠폰이 비정기적으로 생기는 루트가 있었기에

나는 적어도 분기에 한 번은 들렀었다.


누가 봐도 꾀죄죄한 더벅머리의 고등학생

-아니 아니, 무슨 소린가 난 고등학생 때 빡빡이 었다.-

이 가기에는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무엇이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뭔가가 아쉽다.

스타벅스는 어디던 있으니 아무 생각 없이 간다.

두 시간 이내면 메가커피나 백다방을


기약이 없거나 꽤 오래 앉아야 한다면 스타벅스를.

적어도 여기는 테이블이 흔들리거나

충전을 못 해 곤란할 일은 없으니까.


즐거웠던 공간이 무미건조해진 까닭은

네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한 탓이겠다.



사람은 변한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인데, 고치는 건 당신 입맛대로 하겠다는 말 아닌가?


인간은 각자가 하나의 소우주인데,

얼마나 봤다고 사람을 바꾸려 하는가.


자기가 맘먹고 바뀌려고 하지 않으면 잘 안 바뀐다.

그런데, 이건 능동적 변화에 한정된 것.


수동적 변화는 생각보다 쉽고, 빠르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채 일어난다.


애슐리를 가면 행복했'었'다.

스타벅스를 가면 행복했'었'다.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면 행복했'었'다.

누가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행복했'었'다.


엄마가 사준 옷이 아닌,

내가 직접 고른 옷이면 그저 만족스러웠고,

지금은 원단이 어떤지 핏은 어떤지가 보여야

만족스러울 수 있다.


우리의 기준은 계속해서 상향되고 있고,

기준의 인플레는 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찾아오기에

문득 이런 느낌이 드는 순간 자각을 한다.


"여기 조명이랑 좌석 세팅은 좋은데, 목재가 합판인 게 너무 티나네..."


오랜만에 분위기란 것을 즐기러 괜찮다는 카페에 가서 든 생각이다.


"원두가 몇 개 없네? 에티오피아가 당겼는데.."


투썸에서 원두를 고를 수 있게 되어 환호했던 수험생의 그날이 떠오른다. 블랙그라운드와 아로마노트, 나는 산미를 좋아해서 아로마노트를 늘 마신다.




어쩌면 무던함은 축복일지 모른다.

너무나 무던했던 나에게,

무던함이 멋이라 생각하며 일부러라도 감각을 차단시키려 노력했던 지난날의 내 모습은


구형 아이폰을 따로 구해 사진을 찍는 사람과 구별할 필요가 없다.


선명함이 피로를 유발한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그렇다고 필터를 쓰는 인위적임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자연스럽고 싶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는 안 되는 이들의 선택이니까.



감각은 섬세해지고,

주변의 감정을 잘 캐치하며


갈등을 아주 피해버리거나

내가 꾹꾹 눌러 참지 않고

웃음으로 흘려버릴 수 있는 능력.


뭐 그런 거 좋다 이거지.


다만, 손에 깊게 배긴 굳은살이

'원래'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학습된 예민함을 내려놓고, 편안해지고 싶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많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결국 편안함을 찾는 데에는 이런 성찰이 수반되지 않는가

추측을 해본다.



상어는 수면 중에도 헤엄을 친다.

헤엄을 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말미잘은 가만히 있는다.

자리 잡은 그 자리에 가만히.


말미잘은 상어의 죽기 전까지 움직이는 모습이

자유로워 보이고,


상어는 말미잘의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모습이

안정되어 보인다.


동상이몽을 하는 둘이 손을 잡으면

상어 위에 올라탄 말미잘.


죽을 때까지 움직이지만,

죽을 때까지 가만히 있는.



2026. 2. 15.(일) 11:46, 5 생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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