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익숙해지고 마는
번잡함이 싫어, 내 시곗바늘을 조금씩 앞당겨본다.
들일 필요 없는 수고일까? 아니, 고요한 내 자리에
앉을 때면 그런 생각은 물러나고 없다.
출근이야 얼마든지 일찍 나올 수 있다만
퇴근길은 아주 늦게 나가지 않는 이상
전철에 사람들이 빼곡하다.
유명한 환승역이 가까워오면, 괜히 좌석을 흘겨본다.
서 있기보다는 기대는 것이 편해 선택한 이 길의 효용이
이 순간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앉아갈 수 있었는데.
번잡함이 싫은 게 아니라, 서 있는 게 싫었구나.
내가 나를 속이는데, 속이는 방법도 진부하다만
안 속아 넘어가기가 쉽지 않다.
오랜만에 일터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낯설다.
다 그대로인데 나만 바뀌었다.
그동안의 시간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그걸 판단하기엔 아직 이르다.
원래 곧잘 하던 것도 버벅거리는 녀석이
뭘 재고 따지고 하는가. 지금 잡히는 거나 제대로 하자.
휴직 전의 내 삶을 짧게 표현하자면,
'점근선을 향해 가는 삶'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어서
되려 가까이에 가려는 노력조차 게을리하는 그런 삶.
대충 살았냐고 물어보면, 적어도 24년도의 반은 그랬었다.
아무리 걸음을 재촉해도 제자리라면 내가 서 있는 곳이
무빙워크 위는 아닌지 고민해봐야 하니까.
밀린 숙제를 해치우고 돌아오니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중압감이 내 어까를 누른다.
이제 뭐든 할 수 있고,
뭐라도 해야 하는
더 이상의 사사로운 핑계는 씨알도 안 먹히는
정상의 세계에 오랜만의 편입이다.
더 이상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이 와중에 갑자기 내 앞에 자리가 났다.
한 정거장 만에 앉아 간다니, 작은 행운에 기쁘다.
출근길에 앉아서
좋다는 책을 읽으며,
귀에 거슬리지 않는 음악을 들으니
이 시간이 조금 불편할지언정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도 잘 안다.
그런 거 필요 없고 빠른 게 최고라는 것을
내가 나를 또 속이려고 드는데,
진실만이 진리인지는 않으니
이 경우에서만큼은 거짓됨이 마음에 들어
모른 체한다.
많이 피곤하지만, 재미있는 일이 많다.
내가 이처럼 주말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나.
퇴근하면 얼른 집에 가고 싶다.
퇴근하면 뭘 하지 고민했던 과거는 이제 없다.
손바닥만 한 고시원에서 하긴 뭘 하는가.
그곳의 침대에 누워있으면
한 시야에 모두 들어오는
옷 더미, 화장실, 깜빡거리는 낡은 등이
"이래도 안 우울할래?"
협박을 하는 듯했다.
그 협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밖을 쏘다녔다. 다만, 결국 잠이 드는 순간과
눈을 뜨는 순간은 그곳이었으니 묘책이라고 보긴 어렵다.
지금은 해야 할 게 많다.
부지런히 쓸고, 닦고, 정리하고
환기를 하고 못난 구석은 없나 유심히 살펴본다.
그래, 집이란 이런 존재여야지.
휴식의 공간
나만의 공간
편안한 공간
있고 싶은 공간.
나는 밖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안이 싫었던 거구나.
일주일만 더 지나면 사회로 나온 지 한 달이 넘어간다.
그렇게 열심히 쓰던 블로그는 한 달째 방치되고 있고,
그렇게 열심히 뛰던 러닝도, 헬스도
뒷전에 두고 적응만을 위해서 달리고 있다.
아뿔싸. 적응이 좀 되려나 했더니 갑자기
으슬으슬 몸이 춥고 코가 먹먹하다.
점진적 과부하를 이런 곳에 주지 말아 다오.
원래 어제부터 헬스장을 다니려고 빤짝거리는 새 헬스장 1년 치 회원권을 끊어놓았고,
러닝을 하려고 종이 뭉치 사이에 끼어있던 스포츠테이핑을 눈에 잘 띄는 선반 위에 올려두었단 말이다.
체육선생님이 같이 뛰자고 권유하셨는데,
한번 뛰어보고 말씀드린다고 했던 내 대답이
에둘러 한 거절로 느껴지지 않게끔 도와다오.
요즘 신문물을 많이 접한다.
편하다는 의자
좋다는 전자책
괜찮다는 무선 청소기
살면서 처음 써보는 '내' 매트리스
말고도 이것저것,
삶의 질이 상승하다 못해 하늘을 찌른다.
이제 다시 저것들이 없던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이것도 좋긴 한데, 조금만 더...'같은 안이한 마음이 들지 않아 다행이다.
옷은 좀 문제다.
매일 똑같은 옷을 고민 없이 입다가
뭘 입을지 골라야 하니 여간 고역이 아니다.
과거의 난 무슨 이런 허접한 옷들을 입고 다녔단 말인가?
색은 또 어떻고 말이다.
모든 것을 다 정리했지만,
옷장만큼은 손을 대기가 어렵다.
조금만 미뤄볼까.
1년 넘게 살을 비비며 살았던 동기들과 약속을 잡았다.
단순히 시간을 많이 보내서가 아니라
나는 너무나도 어리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운 것이 있다.
깨달음을 주는 존재에게는
기꺼이 고개를 숙이고 배워야 한다.
만나봐야 생산적인 것은 안 하겠다만,
늘 생산적이기만 하면 산업용 기계이지 사람이라 하겠는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요즘이다.
그토록 갈망했던 자유는 달다.
하지만 단맛은 곧 익숙해지고,
단맛 사이에 가려 있던 쓴맛이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그 쓴맛조차 익숙해지고 나니
이게 내가 원래 있던 곳이구나 싶고,
조금만 더 익숙해지고 나면,
계획했던 일 들을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배짱을 부려본다.
맘먹고 안 해본 게 없어서,
나는 내가 두렵다.
했다고 다 원래의 계획대로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해야 하니까.
2026. 3. 25.(수) 06:53 , 출근길 3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