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붕어라서 괜찮은데,
나는 번잡한 서울이 싫고, 한적한 곳의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어.
위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귀족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값싸게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은 저렴하다. 개개인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고, 표준화된 물건은 사고팔기도 쉽다. 내가 평가하는 가치와 남이 평가하는 가치가 일치할 가능성도, 누군가 내가 가진 물건을 사고 싶어 할 가능성도 높다.
'내가 팔고 싶은 가격에.'
구매를 하는 순간부터, 판매를 고려해야 하는 물건은 귀족적이지 않다. 만인이 평등한 이 세상에서 귀족, 귀족 거리니 심기가 불편한가?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릴 수는 없다. 가릴 수 있다면 자신의 눈 정도겠지.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착해 보이는 것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 이외에는 도움이 안 된다.
계급은 존재한다. 우리 주변에 항상.
감가상각이란 말이 있다.
사물은 각각이 부여된 기능이 있다. 거주이건, 심미적 만족이건 어떤 기능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를 측정할 수 있고, 아무런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물건은 가치가 없다.
가치가 없다기보다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낮다. 예전에는 물을 사다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잘 포장된 투명한 병에 담겨있는 물을 사 먹는 행위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기능이 부여되고, 가치가 생겼다.
'다른 물 보다 식용하기에 깨끗할 것이라는 기대감.'
더 나가가서는 공기도 이제 돈 주고 사 먹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아니, 벌써 왔다. 공기청정기는 본질적으로 pet 병에 담겨있는 물과 구별할 필요가 없다.
수돗물을 마시건, 페트병에 담긴 물을 마시건,
환기만 하고 그냥 살건, 공기청정기를 쓰건 개인의 자유다.
가치는 상대적이다. 사람들마다 그 부여하는 기준이 다르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양이 많으며 수요 또한 많은 재화는 가격의 측정이 편리하다. 특정인이 높은 가치를 매겨서 비싸게 구매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코웃음 치며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으로 거래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래량이 많은 주식이나 아파트를 사는 것을 추천하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하다. 거래량이 적은 재화는 구매할 때는 비싸게 구매하고, 팔아야 할 때는 싸게 팔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표준화된 물건은 서민적이다. 서민적인 물건은 감가상각이 덜 되는 편이다. 귀족보다 서민이 더 많기에 거래량은 더 많다. 서민적인 물건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이 '금전적'으로 도움이 된다. 어쩌면 당연한 말을 길게 풀어서 써놨다.
'당연히 서민적인 물건이 금전적으로 저렴한 거 아냐?'
당연히? 당연하다는 말은 굉장히 신중히 사용해야 하는 말인데, 이는 나에게 당연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맥락 언어인 한국어를 사용할 때는 조금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자, 여기에서 질문을 던져보자.
부유한 사람들이 서민적 재화를 소비하고,
보통 이들이 귀족적 재화를 소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부의 양극화가 고착화된다. 안 그래도 잉여자본이 많은 사람들이 소비생활에서까지 감가상각을 덜 맞게 된다면,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두 계층의 차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지게 된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돈을 더 써야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는데, 오히려 더 부유해지는 효과만 나타난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귀족적 재화를 원하는 것은 재앙이다. 사람은 각자 그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며, 운명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력하면 현 상황보다 더 나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현실에 대해서는 직시해야 한다.
한국식 아파트의 미감을 논하며,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표준화된 건물에서 전혀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표정이 죽어 있으며 본인은 이런 환경 속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정이 귀족적인 것이다. 예민하다는 것은 다른 것을 감별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고, 인생의 해상도가 더 높다는 말이다. 본디 예민한 것들은 그들을 위한 좋은, 섬세한 환경에서 길러져야 한다.
4 급수에 1 급수에 사는 버들치를 데려다 놓으면 죽는다. 하지만, 4 급수에 살던 붕어는 여전히 잘 산다. 버들치는 이게 생선이 살 수 있는 환경이냐고 소리 지르고, 붕어는 버들치를 보며 갸웃거린다.
"왜? 나는 살만한데, 너는 죽을 만큼 힘들구나."
이 예시에서 붕어가 버들치보다 우월한가? 4 급수에서 붕어는 살아남고, 버들치는 죽어버렸으니까?
산전수전 다 겪은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내가 있고,
편안한 환경에서 각종 서포트를 받으며 자라온 소년이 있다.
이 둘에게 곰방 막일을 시키면 전자가 더 잘할 가능성이 높고,
이 둘에게 서비스직을 시키면 후자가 더 잘할 가능성이 높다. 누가 더 우월한가?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른 것이다.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에 비해 무조건적인 비교우위를 점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귀족적인 성정을 지니고 태어난 버들치와 같은 사람들에게 서울은 재앙이라고 봐도 되겠다. 붕어인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넓은 세상에는 버들치들이 살기에 좋은 1 급수의 도시들이 꽤나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 4 급수에 내던져졌으니 숨을 쉴 때마다 면도날로 폐를 깎아내려가는 기분일 테다. 그들의 비난하는 잿빛 하늘에 회색빛 콘크리트 도시 서울의 성냥갑 아파트, 날이 서 있는 사람들, 처참한 도시 미감은 그들을 죽이는 독약이다.
서민적인 성정을 지니고 태어난 붕어와 같은 사람들에게 서울은 축복이다. 사람이 많아도 그리 스트레스받지 않으며, 빽뺵하게 지어놓은 아파트 중 한 칸이 본인의 것임을, 또는 앞으로 마련을 할 수 있다는 희망에 그저 감사하다.
표준화된 재미없는 아파트 덕에 아무리 서민이라고 할지라도 출퇴근 시간을 감내한다면 한 칸 내 몸 뉘일 곳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거주 이전의 자유 또한 보장이 되니 붕어 입장에서는 이리도 좋을 수가 없다.
자산에 따른 계층화가 진행되지 않아, 돈이 아주 많은 사람도 아주 적은 사람도 기본적으로 누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50억 아파트에 사는 철수도, 5억 아파트에 사는 영희도 비슷한 급식을 먹고 비슷한 학원에 다니고, 맘스터치 햄버거를 먹는다. 붕어에게 서울은 천국이다. 아직까지는.
스카이라인이 아름다운 유럽의 고즈넉한 도시에 태어났다면, 시내에 방 한 칸에 200만 원이 넘는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교외로 밀리고 밀려났을 것이다. 월급을 받고 월세를 내고 생활비를 지출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어 자산을 축적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돈이 아주 많아서 선택의 여지가 아주 많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귀족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까. 저런 1 급수는 나와 같은 붕어들에게는 맞지 않다.
세종시에서 태어난 왕의 DNA사건을 아는가?
실로 코믹한 사건인데, 본 글의 주제와 통하는 면이 있어 한번 소개해 보려고 한다.
세종시의 공무원이 있고, 그의 자녀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다.
꽤나 말썽을 많이 부렸던 모양이다. 직접 가르쳐 보지 않아도 저 둘 사이에 생기는 트러블의 종류만 봐도 안 봐도 훤 하다. 공무원이 담임교사에게 편지를 하나 보냈다.
"우리 아이는 왕의 DNA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 해줘야만 한다."
상식선에서 요구될 수 있는 내용이라면 이슈화되지 않았을 테다. 괴상하고 해괴한 요구들이 난무하는 그 한 장의 편지에는 공교육에서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요구들로 가득했다.
왕의 DNA는 사실상 내가 위에서 말한 귀족적인 성정과 다르지 않다. 예민하고, 차이를 잘 감별하며, 고성능에 걸맞은 고비용이 들어가는 스포츠카 같은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고성능 스포츠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유지비 때문에 감당이나 할 수 있겠는가? 사고 한 번이라도 나면 인생이 하드모드로 바뀌는데 말이다.
돈이 많으면 4 급수에 태어난 버들치가 1 급수의 환경을 누리게끔 할 수 있다.
왕의 DNA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게 맞춤형의 교육, 값비싼 사립학교의 표준화되지 않은 대단한 교육을 해줬다면 향후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창의적인 인재로 자라났을 수도 있다. 다만, 그 세종시의 공무원은 보건소에서 상급종합병원급의 진료를 바라는 욕심쟁이였기에 이 사달이 났다.
귀족적 성정을 지녔지만, 그 배경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왕의 DNA로 태어났는데 왕이 아니라 공무원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성균관이 아닌 일반 공립 초등학교에 들어가 입맛에 맞지도 않는 교육을 꾸역꾸역 받으니 이 얼마나 복장이 터지는 일인가.
둔감한 사람은 더 좋은 것을 제공한다고 해도, 그 차이를 감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더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대게 더 섬세한 차이로 더 좋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붕어의 삶이 행복할까, 버들치의 삶이 행복할까.
여기가 1 급수냐 4 급수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당신에게 그곳은 몇 급수인가.
2026. 2. 18.(수) 10:56, 마지막 당직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