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다를 즐기는 방법
바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평생을 바다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국토의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 한 사람을 아버지로 둔 나는 뭍에서 나고 뭍에서 자란 순도 100퍼센트에 달하는 육지 사람이지만, 바다에 대한 애착이 깊다.
가슴이 답답하고 무엇인가 잘 안 풀리는 시기는 늘 예고 없이 나를 찾아온다. 그럴 때면 나는 바다를 찾는다. 유년기의 경험들이 나를 절반 정도는 바다 사람으로 만들었나 보다.
아버지를 길러낸 울진 앞바다는 관광지와는 거리가 멀다. 교통이 낙후되어 변변한 고속도로 하나 뚫리지 않은 미개척의 바다. 울진 바다는 그렇기에 청정하다.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는 위로는 삼척, 아래로는 영덕이다.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은 울진 앞바다는 나와 아버지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아버지가 뛰어놀던 바다의 모습 그대로가 내가 보는 모습이니까.
유년기의 여름 중에 꼭 한 번씩은 바다로 갔다. 보통 바다를 간다고 하면, 여름철 피서객들이 몰리는 해수욕장에서 파도를 즐기거나 바다를 눈으로 즐기러 가는 경우가 보통이다. 나는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다를 즐기는 방법이다. 나는 그렇게 배웠다.
<문어>
바닷속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많다. 채집한 생물들을 들고 있을 수는 없으니 튜브를 하나 띄워놓고, 튜브 옆에 바구니를 하나 달아놓는다. 아버지와 나는 바다 위에 떠서 바위를 헤집으며 그날 저녁거리를 찾곤 한다. 적어도 물놀이 이후의 라면이 심심할 일은 없다. 바위 사이에는 늘 맛난 것들이 한가득이었으니.
그런데, 이날은 좀 특별했다. 파도가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평소 나가는 거리보다 조금 더 멀리 헤엄쳐서 나갔다. 나는 물속에 거꾸로 들어가 바위를 손으로 잡고 그 틈에 무엇이 있나 막대로 쑤셔대고 있었다.
물속에 거꾸로 있는 일은 익숙했으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갑자기 바위틈 사이로 검은 먹물이 뿜어 나오기 전 까지는 말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문어가 틈 사이에 있다. 문어가 나를 물 수도 있나? 그런 의문을 떠올릴 새도 없이 일단 바위 사이로 재빨리 손을 집어넣었다. 물컹한 촉감은 너무나 낯설어 손으로 끄집어낼 수 없어 틈 사이로 발을 끼워 넣고 아버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아빠!! 여기 먹물 나와 문어! 문어인 거 같아! 나는 못 잡겠어!
결국 아버지는 한참을 물속에서 사투를 벌이시더니 맨손으로 문어를 끄집어내셨다. 바구니에 담기에는 거리가 멀어 급한 대로 쓰고 있던 밀짚모자에 문어가 들어간 사진이 기억난다. 그날 저녁에는 내가 잡은 문어숙회가 저녁상으로 올라왔다.
재미있는 건, 그때의 나는 문어맛을 몰라 내가 잡은 문어맛을 못 봤다는 것이다. 어쩌면 가장 기억에 남을 수도 있는 문어맛이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문어라고 하면 환장해서 먹는다. 저때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고추고둥>
문어나 전복 같은 특별한 녀석들을 마주치지 못할 경우에는 단연 '고추고둥'이 물놀이 라면에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바위에 한가득 붙어있고 손으로 그냥 줍기만 하면 되는 수준이라 어려울 것도 없다. 외형은 민물에서 주로 보이는 '고디'와 비슷하지만 껍질이 울퉁불퉁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알싸하니 매콤한 맛이 난다. 그래서 이름이 고추고둥이다. 바다에 지천에 깔린 게 고추고둥이었지만, 중학교 시절 이후로 맛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제일 그리운 게 이 녀석이다. 너무 흔해서 소중한지 몰랐던 녀석.
너무 작아서 배를 채우려면 품이 아주 많이 든다. 하지만 라면을 먹다가 중간에 한두 마리씩 까먹으면 고소하고 알싸하니 특별한 맛이 난다. 맛을 본 지 너무 오래 지나 빠른 시일 내에 바다를 들러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군소>
바다에서 온몸이 불어 터질 때까지 놀곤 했던 나는 파도가 심하지 않다면 바다는 무서울 게 없는 놀이터였다. 수심이 깊다 해도 사방에 바위가 있으니 파도에 휩쓸린다 해도 내 신체부위 중 하나는 바위에 닿아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번 공포에 질렸던 적이 있으니 바로 '군소'를 마주했을 때이다. 지금이야 군소 먹방 등의 콘텐츠로 많이 개발되어 보통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생물이겠지만, 나는 그날 이전까지 군소라는 생물을 들어 본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마주친 군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비주얼부터가 살벌하다. 물속에서 저 녀석과 눈이 마주치면 몸이 잘 움직이지가 않는다. 어두운 보랏빛의 몸체를 지닌 군소는 마주치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손으로 만져본 적은 없지만 촉감이 예상이 가는 비주얼이다.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발인지 알 수가 없다. 더욱이 물속에서는 물체가 더 커 보이기 때문에 손바닥만 한 군소도 첫인상은 솥뚜껑만 하다.
바짝 긴장했지만, 궁금증이 앞섰던 나는 거리를 둔 채 군소라는 녀석을 응시했다. 물고기처럼 빠르게 움직이지는 못 하는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그리고는 겁 없이 막대기로 군소를 '쿡' 하고 찔렀다.
재앙이다. 군소에서 갑자기 보라색 물감 같은 것이 확 뿜어져 나왔다. 자연계에서 보라색 무엇인가를 마주치는 일은 잘 없다. 총천연색의 바다에서도 보라색은 이질감이 있다.
그런데, 보라색의 덩어리 진 생물에서 보라색 먹물 같은 것이 확 뿜어져 나오니 나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갔다.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는 울상을 지으면서 삼촌과 아버지께 뛰어갔다.
얼이 빠진 내 설명은 듣던 아버지는 껄껄 웃더니 군소라는 생물이라고 그놈 옛날에 할아버지가 술안주로 드시던 게 기억이 나는데 오늘 한번 먹어보자 하시더니 군소를 주워오셨다.
그렇다. 나는 남들보다 거의 10년은 이르게 군소 먹방을 봤다. 아버지께서도 맛을 보시더니 이걸 어떻게 먹냐고 절레절레하시더라. 이게 나와 군소와의 첫 만남이다. 맛은 지금까지도 궁금하지만 굳이 도전할 생각은 없다. 아직 군소를 생각하면 물속에서 보라색 먹물이 팍 퍼지던 장면이 선명하다.
위에서 언급한 생물들 말고도 해산물과의 추억은 다양하다.
낚싯배에서 잡았던 작은 '참돔' 손바닥만 한 녀석이었는데, 회를 뜨니 네 점이 나왔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원래라면 바다로 돌아갔을 녀석이다. 아들이 낚시에 성공했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낚시꾼으로서의 암묵적인 룰을 깨고 자기가 잡은 물고기의 회맛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바위에서 낚시를 하다 잡은 '복어' 복어는 일반인이 손질해서 먹을 수 있는 물고기가 아니기에 잡히는 순간 바다로 돌아갔다. 입에 바늘이 걸려 잔뜩 화를 내는 복어의 빵빵해진 볼을 쿡 찔러봤던 기억이 있다.
바다 주변에는 '갯강구'라는 곤충이 매우 많다. 바다의 시체 청소부라는데, 사실상 바다 바퀴벌레와 다를 게 없는 녀석이지만, 나는 갯강구가 그리 징그럽지 않다. 해안가에 누워있는데, 내 다리 위로 올라오거나 하면 손가락으로 튕겨 멀리 보내버린다. 반면 바퀴벌레는 완전전투태세를 갖추고 대한다. 무슨 차이일까..
이름을 알 수 없는 초록빛 해초, 검붉은빛 해초 겁도 없이 바다에서 주워서 맛을 보곤 했었는데 꼬득거리는 식감은 괜찮았으나 바닷물을 들이붓는 정도의 짠맛에 해초의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바위에서 제일 재취하기 어려운 녀석은 '삿갓조개'다. 이 녀석은 방심하고 있을 때 바위와 껍질 사이로 칼을 빠르게 집어넣어 한번에 낚아채야 한다. 한번 실패하면 바위에 찰싹 달라붙어 힘을 꽤나 써야 한다.
물론, 해산물 채취용 칼날에는 속수무책이다. 너무 힘을 많이 주면 부서져서 칼날을 바위에 최대한 밀착시키고 힘을 주어야 한다. 채취가 번거로운 것 치고는 먹을게 별로 없다. 식감은 굉장히 꼬독하다.
바닷가 부두 근처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불쾌한 노린내가 난다면 '불가사리'썩은 내일 가능성이 꽤 있다. 해파리도 바다의 골칫거리긴 하지만 불가사리에 비하면 양반이다. 불가사리 녀석들은 모습만 예쁘지 바닷속 각종 패류들을 싹쓸이해 버리기 때문에 어민들의 눈총을 받는다.
보이는 족족 바다 밖으로 끌려 나와 말라죽는다. 나는 불가사리가 예쁘다는 이유로 집으로 가져온 적이 있다. 겉보기에 딱딱하니 조개껍데기처럼 장식용으로 쓰려고 했었지만, 코를 쑤시는 불가사리 썩은 내를 맡고 바로 후회했다. 우리 불가사리 같은 사람은 되지 말자.
이외에도 '전복', '도다리', '바다게', '노래미', '갯지렁이' 등의 수많은 바다 친구들과의 기억으로 내 유년기는 가득하다. 뭍에서 나고 자란 순도 100퍼센트의 육지사람인 내가 반쯤은 바다 사람인 것 같이 바다를 그리워하는 이유이다.
내가 바다를 즐기는 방식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해수욕장에서 파도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해녀안경을 쓰고 칼을 손에 든 채 저녁거리를 찾으러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바다사람의 정체성을 물려주셨기에 나는 바다를 사랑하고, 해산물을 사랑한다. 나중에 내가 아버지가 된다면, 내가 물려받은 이 정체성을 아버지께서 내게 했던 방식 그대로 자녀에게 바다를 선물하고자 한다.
국토의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에서 바다를 그리는 사람이 되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