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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내가 기억하는 것인지, 사진을 보고 기억을 만들어낸 것인지.

by 박승연

유년기의 기억들은 오래된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흐릿합니다.


흐릿한 기억들은 쪼개진 비스킷처럼 매끄럽지 않고 제멋대로입니다. 선후관계도 그 당시의 맥락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의 감정과 날씨 정도만 희미하게 닿습니다.


가끔 오래된 장롱 서랍에서 툭 튀어나오는 사진이 있습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어설프게라도 기억하는 장면과 일치할 때가 있습니다. 제멋대로인 기억들이 조금이나마 맞추어집니다.


사진을 보면 그 장면을 내가 기억을 해내는 것인지 내가 그 사진을 보고 기억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구별이 될 턱이 없습니다.


년월시가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작게 쓰여 있는 사진을 보고, 사진 속에 나의 현재 모습과 닮은 구석이 있는 어린아이가 있기에 의심하지 않고 나이겠거니 합니다.




나는 옥상과 함께한 즐거운 기억이 유독 많습니다. 많은 집을 거쳐 왔지만, 내가 기억나는 가장 오래된 집은 옥상에 회색 페인트가 발라져 있는 3층짜리 빌라 건물입니다. (지금은 초록색)


많은 이들이 아파트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살아온 것과는 구별됩니다. 옥상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 가족밖에 없으므로 옥상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살인적인 대구의 여름날, 튜브로 된 미니 풀장에 바람을 넣느라 진땀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풀장은 수영장 남부럽지 않습니다. 옥상의 아버지의 텃밭이기도 했기에 물장난을 치더라도 화분에 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을 뿌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절이 지나 겨울이 되면 옥상의 모습은 또 변합니다. 겨울에 쉽게 볼 수 없는 눈이 내리는 날이면, 단단히 채비를 하고 옥상으로 올라갑니다. 옥상은 거실의 마루처럼 매일 쓸고 닦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첫눈이 내린 직후에 눈사람을 만들면 꼬질꼬질한 눈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깨끗한 눈사람을 만들고 싶어 장갑을 벗고, 손을 비벼가며 손 날로 조심스럽게 눈을 뜨던 기억이 있습니다.

날이 풀려 눈사람이 죽으면 어쩌냐고 걱정하던 나는 눈사람을 냉동실에 넣었습니다. 언제 눈사람이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해진 수명보다는 오래 살았겠거니 싶습니다.




아버지의 차량은 시골길을 달릴 일이 많았습니다. 산속 깊은 곳이 목적이었는지 목적지를 가는 길이 산속 깊은 곳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차를 한두 대 세워도 될 정도의 여윳공간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계절이 허락한다면 쑥을 캐거나 밤을 줍고, 죽순을 뽑으러 갔습니다. 죽순을 뽑다 몸이 뒤로 날아가 엉덩방아를 찍었습니다.


밤은 그냥 봐서는 먹을 수 있는 놈인지 분간이 안되어 등산화로 밟아대어 껍질을 벗겨봐야 합니다. 그렇게 신경쓰며 노력했건만, 채집한 녀석들을 집에 가지고 가서 확인해 보면 수율이 엉망입니다.


죽순은 너무 자라 버려 질겨서 먹을 수가 없고, 밤은 이미 벌레들이 잔치를 벌이고 난 이후입니다. 아, 잔치 중인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밤의 상한 부위를 칼로 빗겨내어 먹을 수 있는 부분만 남겨놓으면 모양이 삐죽거리는 게 마치 하늘의 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쪄서 낸 밤이면 모를까 생밤은 대개 삐뚤빼뚤한 녀석들이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나에게는 나무로 만든 새총이 있습니다. 한번 잃어버렸다 찾은 적이 있고, 지금은 다시 잃어버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봄날에 쑥을 캐러 갔다가 하산하는 길에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고 아버지께 새총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 현관에 신문지를 깔고 톱질을 하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 이후는 내 손길입니다. 칼로 나무껍질을 벗겨내고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고무줄을 끼웠습니다.


오른쪽 윗부분은 송곳을 너무 깊게 찔러 넣어 금이 가고 Y자 모양으로 갈라지기 시작하는 지점에는 나무가 앓았던 피부병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존재를 잊고 지내다 소파 바닥에서 발견된 직후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나무가 건조한 곳에서 오래 시간을 보냈더니 단단해지고 색이 진하게 바랬습니다.

지금은 또 어딘가에 있겠죠. 우연히 다시 내 손에 들어오게 된다면 소중한 물건을 담아두는 박스에 넣으리라 다짐합니다.




멋진 장면을 보면 카메라부터 꺼내어 듭니다. 요즘에는 항상 그래왔던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으면 기억은 휘발됩니다.


사진으로 남기는 일도 분명히 멋진 일이지만, 과거를 돌이켜 보면 뜨문뜨문 남아 있는 휘발되고 빛바랜 기억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쌓기 위해 노력하는 요즘이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잃지 않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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