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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기와 계산기 2

계산기는 두들기고

by 박승연

사실 누구나 처음엔 다 자기 주머니에 묵직한 계산기와 예리한 각도기가 있는지도 몰라요. 어리면 힘이 펄펄 넘쳐서 자기 주머니에 뭐가 있는지도 몰라요. 뛰어다니면 넘어질까 두려워 주머니에 손을 넣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다 몇 번 상대의 어깨 들썩거림을 보고, 각도기가 나를 재고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나, 예전만큼의 기운이 없어 천천히 걸어 다니기 시작하면 주머니에서 묵직하니 존재감을 드러내죠.


낯선 느낌에 주머니에 손을 쏙 넣어보면 이게 웬걸? 어디선가 본 적이 있던 물건들이 있는 거죠. 아, 나한테도 있었구나 짧은 탄식을 하면서요. 인스타그램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양 굴던 사람이 뒤에서는 계산기를 두들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세상 낭만 다 얼어 죽었구나 혀를 차던 내가 느끼는 것은 요즈음 주머니에서 묵직함이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아직은 체력이 허락을 해 주는지 애써 무시하면서 손을 호호 불고 비벼가며 차가운 계절을 버티고 있어요.




솔직히 이 녀석들을 써본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해요. 남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이렇게 하는 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써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맛있는 것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이런 걸 안 써 버릇하니까 영 손이 안 가더라고요.


그런 거 있잖아요. 분명히 새 물건이 더 좋은 건 아는데, 새로운 방식이 더 편할걸 아는데, 기존에 하던 대로 하려는 몸에 밴 습관이 새로운 것을 거부하는 상황 말이에요.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요즘 운동도 열심히 해서 20대 초반처럼 펄펄 날아다니고 있어서 주머니에 뭐가 있었는지도 까먹었어요. 역시 체력은 국력이에요. 내가 하나의 나라라고 하면 지금의 나는 부국강병이에요.


전쟁을 한다면, 질 자신이 없어요. 전쟁에서 상대를 꺾어버리고 목적을 달성한다고 해도 상대에게 손을 내밀게요. 나에게 져버린 당신을 핍박하지 않을게요. 우리 이제는 싸우지 말자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거예요.


그런데 부국강병이면 뭐해요. 전쟁할 나라가 없는데, 이 나이에 신체적 전성기를 달성할 줄은 몰랐는데, 체력을 아낄 필요가 없는데, 체력을 어디다가 써야 할지를 모르겠으니 애꿎은 러닝화만 축나는 거죠. 군용 보급 러닝화를 나만큼 혹사시킨 사람은 단언컨대 없을 거예요.




세상 모든 것들이 값나가는 만큼 좋은 거라면, 그 좋다는 것을 모두가 똑같이 여긴다면 얼마나 세상살이가 재미가 없게요. 나는 웃기게도 모두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비싼 최신의 러닝화보다, 군대에서 발 사이즈도 대충 맞춰서 신겨버리고 말았던 쿠셔닝도 구리고, 착용감도 이상한 군용 러닝화가 좋아요. 그 투박함이 좋아요. 그래서 비싼 러닝화는 딱 한 번 신고 지금 박스 밖을 못 벗어나고 있어요


. 나는 그 녀석의 역할을 새로 하나 정해주었죠.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나에게는 좋은 게 아닐 수 있다.'라는 격언을 항상 되새겨주는 팝업 알림으로요.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기에는 마음이 아파 대충 옷장 구석에 짱박아두었는데요. 옷장을 뒤지는 순간이 오면 툭툭 튀어나와서 항상 나에게 저 말을 상기시켜 줘요.


그래서 이런 생각도 했어요.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사람도 나는 싫을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가능하다.' 나는 계속 전쟁을 준비 중이지만, 보내고 있는 나날은 평화롭고 여유로워요,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순간이 언제 또 찾아올까요?




나는 원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새벽에 아무 약속은 없지만, 목적지 없이 올림픽대로를 달리며 새벽의 공허한 교통량을 꾸준히 기여하곤 했죠.


지금은 꼼짝없이 밤에는 자야 하고, 낮에는 일을 해야 해요. 새벽에 일어나서 가만히 두 시간 동안 근무를 서는 일도 답답해 죽을 것 같았지만 인간은 또 거기에 적응을 하더라고요.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내가 만든 노트에 헛소리를 끄적이는 일에 적응을 할 때쯤, 밤을 꼴딱 새 버리는 근무로 바뀌었어요. 예전의 나라면 힘들어했겠지만, 지금은 신나게 밤을 새우면서 내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팟캐스트를 옮겨내곤 합니다. 밤을 새우고 나면 종이 더미가 하나 생겨요.


물론 잠들기 전에 내가 휘갈긴 텍스트들을 읽어보면 화장실 거울로 본 얼굴처럼 괜찮다 싶지만, 아침에 깨고 나서 읽어보면 미용실 거울이 따로 없어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내가 내 손으로 받아낸 텍스트잖아요. 미우나 고우나 내가 쓴 거니까요. 그래서 어디 보여주기는 부끄럽지만, 어디다가 꾸준히 게시를 하다 보면 늘겠지 싶어서 블로그에 옮겨요.


쉼 없이 달려왔던(힘들게 달리지는 않았죠) 나에게는 없는 줄 알았던 내 인생의 쉼표를 어쩌다 보니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누리고 있어요. 때 늦은 여유를 즐기다 보면 새벽에 열심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이 주말에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는 모습과 겹쳐 보이고요.




지금부터 몇 개월만 더 지나면 다시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가끔의 뻔뻔한 여유는 내가 만들어서 부려볼 거예요.


나는 원래도 얼굴에 철판을 두른 사람이지만, 이제는 철판이 더 두꺼워져서 어쩌나 걱정도 좀 하긴 해요, 야경이 화려한 골목길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면 누가 철로에 나를 옮겨놓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여유가 있으니 가장 좋은 건,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되돌아보기가 쉽다는 거죠. 여유는 결론적으로 나에게 성숙이라는 선물을 주었어요. 조급함은 사라지고, 그 사라진 빈자리에 여유가 들어차니 성숙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죠. 아쉬움은 사라지고, 기대감으로 채워지고 있어요.


누굴 만나도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야. 그런데 상대도 재미를 느낀다면 손뼉이 마주치는 거죠. 원래도 밥 한번 먹자는 속 빈 강정 같은 인사치레는 하지 않지만, 이러한 성향은 더 강해졌어요. 그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입이 근지러웠으면 바로 약속을 잡아버리고 말아요.


원래 근시일 내의 약속이 아니면 약속이 숙제같이 느껴져서 선호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2주 3주 뒤의 약속이 있는 상황이 아주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 마냥 편안해요.


이제는 뭔가 계획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장기 계획을 어떤 걸 세워볼까 펜을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요. 나한테 바쁜 시간 내주는 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아끼지 않고, 계산기랑 각도기를 다 부숴버리고 있는 힘껏 솔직하게 고맙다고 마음을 전해요.




난 내가 비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할 때면 짜증이 올라오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냥 인정해버리고 말아요. 내키는 대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변덕을 부리기에 사고를 좀 치더라도 내 중의 내가 다 알아서 하더군요.


그래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거예요. 난 누군가를 오해하게끔 행동하지는 않아요. 아까 얼굴이 철판을 깔았다는 말이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에요. "너 왜 그렇게 뻔뻔해 어이없어."라는 말을 종종 듣고 사니까 영 근거가 없는 소리는 아니죠? 내가 바라는 모습 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내가 원하는 내 모습이 남들에게도 비슷하게 비치기를 바라는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음도 숨기고 행동도 누르곤 했었는데, 기본적인 사회성이 다 갖추어진 상태의 사람들이 모인 집단에서는 내가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문제가 없더라고요.


내가 원하는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과는 다소 괴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연기가 필요할 정도의 노력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좋아요. 결국 하다 보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쉬워지고, 쉬워지면 잘하게 되니까요. 그런데 잘하는 것은 보통 좋아하게 되는 게 종착지죠?


여유로워 보이고 싶었는데, 없는 시간을 쪼개 여유를 부리다 보니 처음에는 숨 가쁘고 힘들었지만, 요즘은 꽤나 여유로워요. 계산기랑 각도기가 주머니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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