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도기는 재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눈에는 생기가 넘쳐요. 기운이니 영혼이니 하는 것들은 믿지 않겠다고 말하셔 살아가는 나이지만, 사람의 눈빛은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해요. 의지, 생기,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까지.
누군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시선의 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요. 그리고, 그 시선이 머무르는 곳과 그 너머를 상상해 보면 대략적으로나마 가늠은 해볼 수 있어요.
좋아하는 일에도 사람의 눈은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리는데, 그 시선이 머무르는 곳이 사람이라면 오죽하겠어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 내뿜는 기운은 눈으로 보이는 것과 더불어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기도 하고, 몸을 그 사람을 향해 기울이기도 하는 등의 행동 등으로도 보이죠. 아마 그 사람은 모르겠죠. 자신이 말은 하지 않지만 온몸으로 무얼 드러내고 있는지.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일은 즐겁죠. 감정의 고양, 때로는 감정의 격양까지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즐거운 일인데, 그 대상이 머무름 없이 흐르는 가변적 존재인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변화한다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불확실성까지 포용하겠다는 마음이잖아요. 사람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앞으로 지나가야 할 길이 있기에 지금 보이는 장소는 잠시 머물러 있을 뿐이니까요.
역시 인간은 비합리적인 존재예요. 결정론적인 기계적 우주론이 성립할 수 없는 이유를 멀리 가서 머리를 싸매며 찾을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비합리성과 불완전함이야말로 기계적 우주론의 부정을 방증하니까.
이런 감상을 떠올리는 일은 혼자서는 힘들어요.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나도 저런 적이 있겠거니 추측만 할 뿐이죠. 그렇잖아요. 내가 찍은 셀피와 남이 찍어준 사진이 너무 다르고, 내가 알고 있는 내 목소리와 녹음된 내 목소리는 너무 다르게 느껴지잖아요.
내가 뿜어내는 기운은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내 시선의 끝을 바라보는 사람이 알아챈다는 것을요. 나도 해봤으니까 으레 짐작하는 거죠.
사랑에 빠진 사람의 눈을 봤어요. 3대째 물려오는 양봉장 저리 가라예요. 그 사람의 시선은 상대를 향해 머물렀다가, 그 상대가 보고 있는 곳으로 갔다가 잠시도 쉬지 않고 갈팡질팡 해요. 그런 감정이 시간이 지나 닳고 매끈해지면 그게 본모습임을 이제는 알아요.
시작부터 미적지근한 사랑이 있나요? 너무 익어버려 땅에 떨어지고 말거나, 새롭게 자리 잡아 밑동이 듬직한 나무를 길러내거나 하겠죠. 그러나, 내 눈에 당장 보이는 것은 나중이 아니라 반짝거리는 지금 당장의 모습이니 배가 살살 아파요. 이렇게 말은 하지만, 두 남녀가 예뻐 보여 내가 해준 것은 없지만 기특해요.
내가 사람들의 눈을 열심히 본다는 것을 자각했을 무렵, 다른 사람의 눈을 보는 일이 어려워졌어요. 내가 그렇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하니까요. 내 눈빛이,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나 조차도 가늠이 안 되는 상황에서 내 눈을 보인다는 것이 속내를 들키는 일 마냥 부끄러워 이만 시선을 피해버리는 일이 잦아요.
그래서 안경을 써요. 이제는 안경 없이도 또렷한 세상을 볼 수 있지만, 갖은 핑계를 대면서 안경을 쓰고 다녀요. 내 맨 눈을 보이는 일이 누군가에게 내 속내를 훤히 보여주는 일 같다고 여기면서 말이죠. 원체 거짓말을 못 하는지라 대가 대는 핑계를 듣는 사람은 피식 웃고 말아요. 그냥 속아주기 바라요.
무엇인가를 좋아할 때는 그 대상의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할 필요는 없어요. 아니, 차라리 모르는 게 많은 게 더 나아요.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에 이름 모를 쟤료들이 잔뜩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들을 다 알 필요는 없잖아요.
우리는 자동차의 구조를 다 알면서 자동차를 운전하지 않으니까요. 좋아하는 대상의 모든 것을 다 알지 않아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어요. 사람은 비합리적이고,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일이 재미있죠.
합리적인 행동은 따분하고 한숨이 나와요. 눈 쌓인 언덕을 매끄러운 판에 발을 고정해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일 따위가 뭐가 합리적인가요?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파도 위에 두 발로 올라가겠다며 몇 번이고 물 위에서 꼬꾸라지는 일은요? 이름 모를 타국의 화가가 휘갈겨놓은 캔버스의 물감 뭉치를 줄 서서 구경하는 일은요? 결과적으로 재미있으니까 우리는 누가 등 떠밀어 시키지 않아도 그냥 하는 거겠죠.
원하는 숫자들을 모아서, 계산기에 두드린 결과는 내가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항상 똑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을 모아놓고 뭐가 되었건 함께 어떤 일을 한다면 결과가 항상 똑같을까요?
고도로 훈련된 직업인들의 작업이라면 모를까. 즐기려고 모인 사람들이 기계처럼 딱딱하게 굴지는 않겠죠. 똑같은 결과가 나오면 얼마나 재미가 없게요. 세상 일이 다 정해진대로 흘러간다면, 나는 그냥 내 인생의 파워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 속에서 살아갈 것 같아요. 잠자리에 드는 순간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라 확신을 못하겠어요.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재미를 느껴요.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 마냥, 좋아하지 말자고 나 혼자 수 없이 되네어도 이미 좋다는 생각이 피어오른 이상 후후 불어도 성가시게 들러붙어 사라지지가 않아요.
주머니 속에서 잔뜩 꼬여버린 이어폰 줄을 어두운 곳에서 한 손으로 풀어내는 것 정도로 성가시죠. 오히려 마음을 외면하겠다는 생각이 거름이 되어버려 더 튼튼하게 자라나고 꼬여버리고 말죠. 그냥 '좋은가 보다.' 하고 나를 내던져요. 잊은 듯 주머니에 박아놨더니 어느 날엔가 말끔히 풀려서 꺼내질 수도 있는 게 마음이니까요. 굳이 내가 애를 써가며 해결해 보이겠다고 덤비다가 꼬여 버리면 답도 없어요.
좋아하는 마음이 쌍방임을 확인하는 순간만큼 짜릿한 일이 또 있어요? 자극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쉼 없이 저 감정만을 좇아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처럼 굴기도 하지만,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이 분야에서는 나잇값을 하는 편이라 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아요.
이 감정이 시간이 지나면 쪼그라들고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음을 알아요. 대신에 안정감이라는 발판이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로 슬그머니 내 발아래 끼워져 있겠죠.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지만, 안정감이라는 녀석이 내 발아래 끼워져 있다면, 부리면 안 되는 욕심이 부려봄직 한 욕심으로 바뀌겠죠. 그렇잖아요.
절벽에서 그냥 뛰어내리는 행위는 파워를 뽑는 일이지만, 믿음직한 바위에 묶어놓은 질긴 로프가 있다면 '다시 시작' 버튼이 되어버리니까요.
마음이 항상 처음과 같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변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변화가 '변했어'가 아니라 '변했네'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다 마음에 들어야 시작이 가능하다면, 그 정도로 사람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합리적이라면 인류는 지금과 같은 번영을 누리지 못했을 거예요. '아 몰라 지금은 일단 마음 가는 대할래'라며 내지르는 사람의 수가 더 많으니까 불확실성이 다양성으로 확장되어 새로운 먹거리가 꾸준히 생겨났겠죠.
모두가 불확실성을 감내하지 못해 쪼그려 앉아 돌다리만 두들기고 있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주먹도끼를 들고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겠죠.
변했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 마음을 아끼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의 내 상황에 충실하고, 각도기와 계산기로 상대를 가늠하지 않을래요. 각도를 재려면 각도기를 상대에게 가까이 대어야 해요.
내 손에 들러 있는 각도기는 상대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어요. 상대의 마음을, 상황을 계산하려 계산기를 두들길 때면 내가 아무리 몰래몰래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겨도 상대의 눈에는 수상한 어깨의 들썩거림이 보일 거예요.
서로가 각도기를 꺼내서 들이밀고 있고, 상대가 안 보고 있을 때 계산기를 두들기는 그런 낭만 없는 행위는 시작부터 아쉬움이 가득하겠죠. 세상에 내 맘에 쏙 드는 사람이 나를 마음에 쏙 들어할 확률 따위는 건방지게 가늠하려 하지 마요.
내 생각이 틀렸다고 누가 지적할 때면, 틀린 건 없고 다른 것만 있다고 박박 우길 거예요. 요즘 세상이 얼마나 삭막한데 낭만 찾으려다가 얼어 죽는다고 핀잔을 주면, 뜨끈한 아랫목 세어 가만히 누워있다가 죽을 바엔 밖에서 뛰어다니다가 얼어 죽을 거라고 말할래요.
마음을 아껴뒀다 나중에 꺼내 쓰면 이자가 붙어요? 바나나를 냉장고에 처박아뒀다가 나중에 꺼내먹으면 바나나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시커먼 반점만 생겨나겠죠.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힘 조절을 못해 냅다 밀어버리면 어떡해요. 그런 복잡하고 머리 아픈 수싸움은 부동산에서만 할게요. 본능에 충실하고, 마음에 솔직하면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