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왔니, 왜 왔니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어 늘 고마운 마음이 들던 구름이 지쳐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 노고에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음산한 기운이 든다며, 앞을 잘 안 보이게 한다며 미움을 받는 안개가 되는 것을 보면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가 정말 중요해 보입니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던 소나무도, 곱게 뿌리를 살려 열대 지방에 고이 심어놓으면 물을 만난 강철처럼 이내 힘을 쓰지 못하고 갈색 빛으로 바스러지고 맙니다. 소나무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또, 더운 열대 지방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저 소나무와 열대 지방의 기후가 서로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열대 지방은 등 떠밀려 온 소나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아니, 여길 왜 온 거야?)
그렇기에 사람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고유한 특색과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저 주어진 것인지 환경에 적응한 것인지는 구별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성장하는, 성장이 완료된 개인은 무형의 성질이 한껏 배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환경에 놓이냐에 따라서 구름 같은 존재일 수도, 안개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죠. 자신의 푸르름을 자랑하며 굳세게 살아갈 수도, 금세 지쳐 시들어버려 갈색 빛으로 바스러져버릴지도요.
내가 몸담고 있는 학교라는 공간도, 모두에게 뿌리내리고 줄기를 세울 만한 적합한 공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원래 다수를 상대하는 곳은 특정 개인에게 딱 맞는 맞춤 환경이 되기란 어려우니까요. 정규분포표에서 중앙을 기준으로 좌우 한 뼘 정도의 사람에게나 지낼만한 곳이라고 봄이 옳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공립학교의 교사로 일하는 저는 학창시절, 학교에서 그다지 적응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머릿속에는 '왜?'가 떠올랐지만, 선생님들께서는 이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우셨죠. 개인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학교에서 시들어가던 나의 다짐은 다시 학교로 돌아와 나와 같은 아이들이 스스로를 탓하지 않게끔 하겠다는 소명으로 자라났습니다.
학교는 사회생활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체험의 장의 역할을 합니다. 단체의 규율에 맞추어 스스로의 개성을 죽이고 감내해야 하는 순간 또한 수 없이 많이 존재합니다.
학교에 적응하기 힘든 학생을 단순히 문제아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사회는 학교의 그것보다 다양한 조직이 존재하고, 그 다양성만큼이나 그에 맞는 사람들 또한 존재합니다. 그래서 나는 소위 말하는 문제아들을 대할 때 이런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달하고자 노력합니다.
"네가 학교나 혹은 규율 하에 움직이는 조직에서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네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에서는 이곳에서 단점이라고 치부되는 특성들이 대단한 장점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 만나는 단체나 조직에서는 목표를 위해서 규칙과 통제가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그것을 너희들에게 미리 경험시켜 주기 위해 학교가 이렇게 운영된다는 것을 이해해 줘."
아이들의 볼멘소리를 잠재우기에는 다소 부족하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내 심정을 헤아려 주려고 노력하는구나 정도의 믿음 반, 불신 반의 눈빛을 보내면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도 그랬어 인마."
대개의 경우 교사는 모범생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이 커서 선택을 하는 직종입니다. 하지만, 나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모범생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죠.
제가 들었던 말 들을 한번 나열해 볼까요?
"네가 사대를 간다고? 너 성적에? 아이고.. 아서라 꿈깨 말도 안 된다."
"네가 사대를 간다고 해도, 임용시험 통과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뭐? 승연아 네가 사대를 갔어?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너무 깜짝 놀랐다."
"아이고 승연아 네가 교사가 되었어? 깔깔깔 나는 너무 즐겁다~ 너도 너 닮은 애들 받아서 고생 한번 해봐라~ 교직에 들어온 걸 축하해~"
"나는 솔직히 네가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사범대에 원서를 쓴다고 했을 때, 제정신인가 싶었다."
뭐... 이런 말들을 숱하게 들었죠. 제 반골기질이 어디 가나요. 저런 말을 들으면 더 하고 싶어서 안달인걸요. 결국 우여곡절 끝에 꽤 빠르게 학교에 돌아오게 되었고, 제가 생각하던 학교랑은 달리 학교는 생각보다 개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애들이 아무리 개기고 못되게 굴어봐야, 다 제가 해봤던 것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어찌 보면 장점일까요.
어떤 선생님들께서는
"어휴 저 녀석들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화장실에서 물에 적신 휴지 던지고 놀다가 적발된 상황)
라고 말씀하지만...
휴지를 얼마나 적셔야 미끄러지지 않고, 화장실 벽에 '착'하고 잘 달라붙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저는 그냥 조용히 있었습니다. 저걸 아는 이유는 많이 던져봐서겠죠^^
점심시간에 몰래몰래 학교 담을 타 넘었던 저는 우리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만 장난치고 놀고 있음에 아주 감사하며 교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이야 학교탈출하다 사고 나면, 그 녀석의 부모님이 자신의 자녀를 족치겠지만,
"아이고... 선생님.. 제가 자식 관리를 못해서 보내놓은 학교 밖을 싸돌아다니다 다쳐오네요... 죄송합니다."
지금은 아닐 가능성이 꽤 높으니까요.
"학교에서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점심시간에 학교 밖을 나가서 다쳐요!"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죠.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라는 말.
그런데 그것이 무조건적인 허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내야 할 것은 따끔하게 할 필요도 있고요.
저는, 저 마음을 읽어주는 일을 꽤 잘합니다. 해봐서 공감이 가니까 읽는 건 그리 어려울 건 없죠.
하지만, 이 마음을 읽어주라는 말이 오독되어 이기적 인간을 양성하는 길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우면서도, 과거의 비인간적인 학교의 모습이 지금에는 찾아볼 수 없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 정도가 과해 새롭게 균형의 조정을 필요해 보이지만요.
저는, 2011~2013년도에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처음으로 제정된 것이 2014년이니 정말 중학교 생활을 다소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다녔다고 자부할 수 있겠네요.
무차별적인 폭력이 만연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뺨을 맞는다거나, 구둣발로 정강이를 까인다거나, 단체 얼차려를 한다거나, 집에 안 보낸다거나 하는 등의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했었죠.
달라진 세상에서도, 아이들은 여전히 불만이 많습니다. 당연하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하나의 불편한 점이 사라지면 새롭게 불편한 점이 생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인간의 적응력은 불편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편한 상황에서도 작동을 잘하기에
'서 있으면, 앉아있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있으면, 자고 싶다.'
이 말이 정말 진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잖아요. "아~ 이것만 해결되면 소원이 없겠다."라고 항상 외치고 다니던 사람도,
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소원이 생깁니다.
이 아이들의 불만사항을 듣고 있으면, 지금과 같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세상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음을 더욱 체감합니다. 이 녀석들과 저는 나이 차이가 많아봐야 띠동갑 남짓이니까요. 불과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매일 일어나는 곳이 지금의 세상이니까요.
그렇기에 나는 새로 다가올 세상에는, 각자의 푸르름을 양껏 뽐낼 수 있는 다양성과 그 다양성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고차원적 공감의 힘이 길러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상적 사회를 상상해 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짓곤 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학교에서 갈색으로 바스러지던 내가 지금은 학교에서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는데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노력이 쌓이고 쌓여 어느새인가 균형이 맞추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교육의 효과는 10년 뒤에 나타나는 경우가 흔합니다.
학교 다니던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말과 행동이 이제는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는 것을 넘어서 실천으로 옮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도 당장은 답답할지언정, 10년 뒤를 바라보고 행동하고 교육에 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