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담는 공간
[나중에 내 집을 구한다면, 이런 공간으로 두고 싶어요. 온전히 나를 담는 공간으로.]
짧은 숫자를 눌러 문을 열면 현관이 보여요.
현관이라 부르기엔 거실까지 훤히 보이니까 좀 민망하네요.
신발을 벗고 몇 켤레 없는 신발장에 넣어두어요.
바닥에는 딱 두 녀석만이 허락되어요. 슬리퍼와 러닝화.
슬리퍼는 집 근처에 가까운 볼일을 볼 때,
러닝화는 매일 아침의 시작을 할 때,
매일 신을 녀석들이라 이 두 녀석만을 허락해요.
출근을 할 때면 그날의 복장에 따라 스니커즈를 신을 수도, 구두를 신을 수도 있으니
정해지지 않았기에 바닥에 두지는 않아요.
신발장에는 무릎에 언제고 붙일 수 있는 테이핑과,
가볍게 들고나갈 500ml 물통이 잔뜩 쌓여있죠.
10km를 뛰고 나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자리에서
500ml의 물을 바로 비워낼 거니까. 물이 더 많을 필요도 적을 필요도 없어요.
주방과 거실이 구별이 잘 안 되는 좁은 집이에요. 그래도 주방을 먼저 거쳐야
거실로 갈 수 있으니 주방을 한 번 살펴볼까요.
주방에 있는 냉장고를 한번 열어봐요. 나는 주기적으로 냉장고 털이를 하기에
싱싱하지 않은 식쟤료는 없어요. 생기를 잃어버리려는 재료는 샤브샤브가 되거나
비빔밥이 되어버리니까요. 냉동실에는 냉동 참치가 준비되어 있어요. 기분 좋은 날에는
참치 뱃살을 해동해서 그럴듯한 참치 한 판을 내드릴게요.
올리브나 치즈 같은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안줏거리들이 있어요.
밖에 나가서 술을 마실 일은 종종 있겠지만, 계획 없이 들인 손님에게
낼만한 핑거 푸드는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해요.
코팅이 되어 있지 않아 적절한 예열을 필요로 하는 구리 팬이 걸려있어요.
잘 사용해보려 하지만, 계란이 눌어붙는 일이 많아 검은 검댕이 종종 생기곤 해요.
그걸 갈아내기 위한 연마제도 싱크대 옆에 늘 준비하고 있죠.
찬장을 열면 파스타 면이 종류별로 줄 서있어요. 소스를 잔뜩 머금을 수 있는
거친 질감의 듀럼밀 파스타가 굵기별로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니
언제고 내 마음에 드는 파스타를 끓일 준비가 되어 있음이 흡족해요.
작은 용량의 밥솥은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지만, 밥맛에 민감한 나는
솥밥용 솥이 싱크대 아래에서 항상 대기 중이에요.
전기밥솥에 내버려 둔 밥은 채 하루가 지나지 못해 밥맛을 잃어버리고 마니까
작은 햇반도 10개 정도는 항상 비상용으로 구비해 두어요.
쌀은 고시히카리를 사놨어요. 한국인은 밥심인데,
밥을 짓는 쌀은 기왕이면 좋은 걸로 준비해 놔야죠.
주방과 거실 사이에는 검은색 긴 탁자가 차지하고 있어요.
주방 쪽에 서서 거실을 바라보면 우리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몇 종류의 칵테일 정도는
제공할 수 있는 작은 홈바가 준비되어 있죠.
아마레또 사워는 제 시그니처 메뉴고요. 그걸 위해서 항상 싱싱한 계란은 준비되어 있답니다.
흔한 칵테일은 다 가능해요. 그걸 위해서 다양한 글라스를 준비해 두었거든요.
마티니 글라스, 락 글라스, 샷 글라스, 길쭉한 글라스 이 정도의 기본 잔들은 두 개씩 준비해 놨어요.
위스키를 여러 잔 따라놓고 비교해 보며 마시는 콘텐츠를 위해 글랜케런은 넉넉하게 6개가 있어요.
하이볼, 진토닉, 마티니, 깔루아밀크, B&B, 잭콕, 롱아일랜드아이스티 정도면 홈바치곤 훌륭하죠?
멋진 셰이킹은 보여드릴 순 없지만, 근사한 얼음은 미리 얼려두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을 위해 골드메달이나 페리에도 준비되어 있으니 말만 하세요.
위스키는 적어도 10병은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피트는 4병 정도. 그리고 나머지는
셰리, 버번, 블렌디드 다양하게 준비해 놨죠. 위스키가 낯설다면 흔히 먹던 산토리 하이볼을 드릴게요.
이제 거실로 들어가면 좀 난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감성 카페 같은 느낌은 아니지만,
제 취향이 잔뜩 드러난 공간이니까 다소 이해는 해주세요. 어지러울 수는 있지만
지저분하지는 않답니다.
커튼을 열면 보이는 풍경은 집의 넓이와 반비례 관계가 있을 텐데,
나는 좁은 집이라도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 사회초년생의 보금자리 치고는
풍경이 괜찮을 거예요. 망설이지 말고 커튼을 열어봐요.
벽에는 메모홀더가 사정없이 붙어있을 거예요. 거기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빼곡한 텍스트가 적혀있는 A4용지가 여러 장 붙어있을 텐데,
내가 평소에 뭘 하면서 사는지는 우리 집 거실만 봐도 대충 가늠이 될 거예요.
본격적으로 거실을 둘러보기 전에 옆에 있는 침실을 잠깐 볼까요?
침실은 침대랑 옷장만 덜렁 있을 거라 딱히 구경할 건 없는데,
머리를 말리고 기초 화장품을 바르기 위한 작은 거울 앞에는 향수 네 병이 있어요.
여름용, 겨울용, 사계절용 그리고 기분 내킬 때 뿌릴 수 있는 잔향이 은은한 향수 한병 까지요.
다시 거실로 나와보세요. 한쪽 벽면에는 기다란 책상이 있어요. 중앙에는 브런치 카페에서 볼법한
적당한 사이즈의 테이블이 하나 보이죠?
책상에는 노트북이랑 책이 이것저것 올라가 있는데, 침실 말고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이에요.
노트와 종이 펜, 프린터까지 정신없이 이것저것 올라가 있는데,
나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아니까 필요한 게 있다면 말만 해주세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물건을 찾아다 드릴 거니까요.
중앙 테이블에서는 간단한 식사도 가능하고, 커피도 한잔 할 수 있어요.
우리 집은 좌식이 아니라 입식이라 카페 같은 분위기가 풍기기에 커피 맛이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에스프레소 머신을 가져다 놓기는 부담스러워, 다양한 드립백이 있으니
산미 있는 커피를 좋아한다면 우리 집에 놀러 오기 좋을 거예요.
카페인이 걱정된다면 디카페인 곡물차도 다양하게 구비해 놓았으니 말만 하세요.
남쪽을 향하는 커다란 창문 바로 옆에는 빈백이 있어요.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좌식으로
운영되는 공간이죠. 벽에 등을 기대기에는 불편하고, 소파를 놓기에는 애매하니
작은 빈백 두 개를 가져다 놨어요. 그 앞에는 낮은 커피테이블이 있으니
핑거푸드를 집어먹으면서 스탠바이미로 영화 정도는 거뜬히 볼 수 있답니다.
아까 거실 벽을 보다가 말았죠? 거기에 뭐가 있는지만 둘러보면 우리 집 구경은 다 끝났어요.
지역 구별만 있는 커다란 서울 지도가 하나 있고, 나는 기억에 남는 장소를 표시해 놔요.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거기에 다 골라두었으니 가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만 하세요.
가이드가 될 수는 없어도, 함께 즐기기에는 충분한 공간들이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
내 욕심에 거실이 스튜디오 역할까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커다란 화이트보드 하나를 둘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직업이 교사라서 그런지, 나만의 스튜디오가 하나 필요한데
나중에 거실을 제외하고 방이 두 개 정도 있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면
그중에 한 방은 스튜디오가 될 거예요.
지금은 집이 좁아서 거실이 작업실 겸 식당 겸 카페 겸 스튜디오지만,
물건을 그리 많이 두지는 않을 거라 있기에 불편함은 없을 거예요.
우리 집 소개가 끝났어요.
집은 어떤 사람을 온전히 담아내는 공간이죠.
나라는 사람의 소개를 집을 구경하는 것으로 대체가 가능할지도 몰라요.
어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가늠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