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20250826월)
웃기게도, 내가 최근에 가장 즐거웠던 기억은 군부대에서 있었던 식당 대청소 시간이었다. 청소가 시작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식당 청소는 총 3개조로 세 끼니를 나누어서 진행하는데, 오늘 이미 청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모든 인원이 청소를 하러 가라는 것이다.
오늘 저녁에는 느긋하게 달리기나 해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송에서
"아 아 당직사관이 전파합니다. 모든 본부중대 인원들은 식당 대청소를 하러 이동하기 바랍니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휴식시간의 침해에 나는 짜증을 내며 청소를 하러 갔다.
"아~ 청소 전문병사여 아주, 전역하고 기록 떼서 교육청에 제출하면 청소교원자격증이라도 나오겠어."
입술을 삐죽대며 걸레질을 하고 있던 찰나에, 취사병들이 낑낑대며 정체모를 고무 대야를 식당 중앙에 턱 하고 내려놓았다. 고무 대야는 성인 남성을 잘 구겨넣으면 들어갈 정도로 컸다. 대야 안에서는 물과는 다른 점도로 예상이 되는 액체가 넘실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무대야를 뒤집어 바닥에 무엇인가를 흩뿌리는게 아닌가. 쏟아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평평한 식당 바닥에 점도 높은 액체가 쫘악 깔리고,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정체모를 커다란 기계로 바닥을 사정없이 문지르기 시작했다.
업소용 바닥 청소 기계였다. 기계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웅웅대며 돌아갔고, 바닥은 순식간에 검은색 비누거품물로 흥건해졌다. 숨이 턱 막혔다.
저걸 이제 우리가 다 치워야 한다는거지?
취사병들은 바닥을 열심히 닦아냈다. 비눗물은 바닥과 만나 검은색 구정물이 되었다. 구정물들이 어디까지 흘러가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던 찰나에 뒤에서 취사병 한 명이 외친다.
"이제 바닥의 거품들을 저기 안쪽으로 밀어주십시오."
취사병은 손에 물기를 제거하는 용도의 밀대 6개를 들고 있었다. 손가락은 식당 내부의 배수로를 향하고 있었다. 저 말을 듣고 선듯 손이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여기서 점잔빼고 뒷짐지고 앉아서 다른 사람들 청소하는 모습을 구경할 짬은 아니지 않는가.
사실 짬순으로 따지면 밀대 6개의 주인이 내가 아니어야 하겠지만,
(필자는 짬을 조금 먹었다. 곧 상병 4호봉이다.) 계급으로 일의 분담이 갈리는 일을 끔찍히도 싫어하는 나는 언행일치를 하고 싶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밀대를 들고 바닥을 밀기 시작했다. 구정물이라 부를만한 비눗물은 양이 상당했고, 밀대질을 할 때 마다 이리 튀기고 저리 튀겨 바지와 신발을 적시기 시작하니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런데, 밀다가 보니 내가 언제 바닥에 있는 흥건한 물들을 밀대로 밀어봤는지 생각해보니, 이번이 처음이었다.
기껏해봐야 화장실 청소의 마무리에서 손바닥보다 조금 큰 물기제거기로 유리나 좀 닦아내던 것이 전부였다. 생각보다 흥건한 바닥의 물기를 깔끔히 제거하는 어린아이만한 커다란 밀대의 성능은 괜찮았고, 손맛이 있었다.
화장실에는 기본적으로 타일에 구배를 넣어 시공하기에 물이 알아서 배수구로 흘러가지만, 식당의 바닥은 그런 경사따위는 없기에 밀대로 밀지 않으면 물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물을 훔치는 밀대의 움직임이 조금만 서툴러도 물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너무 힘을 주면 물이 모이다가 얼레벌레 옆으로 새어버리고, 힘을 적게 주면 바닥의 물기가 제대로 제거되지 않는다.
총기의 영점을 잡듯이 밀대를 조작하다보니 어느 정도의 힘을 주면서 바닥을 밀어야 효과적으로 비눗물을 밀어낼 수 있는지 가늠이 되더라.
몇 분이 지나자, 나는 바닥 밀대질에 완전히 몰입하여, 온 몸에 비눗물이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밀대질을 하고 있었다.
실소가 나왔다. 짜증을 내고 뒷짐을 지던 내 모습은 온데간대 없고 수십명의 병사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신나게 물을 밀어댔다. 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나는 튀겨낸 구정물인지 흘린 땀인지 모를 정체모를 액체로 흥건해졌다.
뒤에서는 동기들이 웃었다.
"아니 승연쌤 뭐야 포세이돈이야?"
사실 밀대질을 열심히 한다고 내게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빨리 청소를 끝내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팔을 걷고 나섰겠지. 순전히 처음 해보는 작업이 손에 익어가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다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짜증내며 들어갔던 식당에서 물에 쫄딱 젖은 상태에서 웃으면서 나왔다.
내가 피하려고 했던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굳이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상황에 몰입하는 과정을 거치니 태도와 상황을 받아들이는 내 관점이 조금 바뀌었다.
이것 말고도 식당 청소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파리와 관련된 것이다. 파리는 모기보다 속력도 빠르고 덩치도 커서 주변에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굉장히 성가시다.
식당에 파리채가 구비되어 있지는 않으니 청소를 하다가 파리 잡으려고 시도를 해봤지만, 애꿎은 손바닥만 아프고 파리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버리고 없다.
한 번은 파리가 너무 성가셔서 어떻게 하면 저 녀석들을 잡을 수 있을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걸레를 던져서 맞추려고 해봤으나 나의 형편없는 제구력은 파리를 맞추기는 커녕 걸레질거리만 늘어나게 했다. 구정물이 내 몸에 튀는 것은 보너스다.
이미 청소는 거의 마무리가 된 상태라서 여유가 있기에 걸레의 물기를 조금 제거한 상태에서 파리의 뒤편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채찍처럼 걸레의 끝을 잡고 휘둘렀다.
파리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웨엥하고 내 귀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파리를 따라다니면서 걸레질?을 하다가 보니 걸레의 끝쪽의 면적이 좁아서 파리를 정확하게 타격하기가 어려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래서 걸레를 이불을 개듯이 3분의 1씩 접어서 중국당면 모양으로 만든 다음에 파리를 타격했다. 결과는 성공. 파리와의 싸움에서 처음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후로는 파리가 보일 때 마다 걸레질을 했다. 내 걸레질은 번쩍 빛이 나고 바닥에는 파리가 툭 하고 떨어졌다. 처음에는 타율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적당한 걸레질의 스냅과 물기의 정도를 파악하고 나니 점점 타율이 올라가더니 지금은 거의 8할의 타율을 보여준다.
파리를 잡는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나, 파리, 걸레 이렇게 셋만 존재했다. 나는 파리를 잡는 그 과정에 완전한 몰입을 경험했다. 파리를 잡는 실력이 상승했음에 뿌듯했고, 파리를 척살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취사병은 혀를 내둘렀다.
"무슨 밥먹고 파리만 잡았어?"
재미일까? 흥미일까? 나에게 이 순간의 집중력과 고양된 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밀대질을 잘 하고자 하는 목표 따위는 나에게 없었고, 파리를 잘 잡고자 하는 욕구 또한 살면서 한 번도 가진적이 없었다.
(사실 가정집에서의 주적은 파리가 아니라 모기이다. 모기를 잘 잡기 위한 방법을 아는 사람은 아낌없이 공유해줬으면 하는 바이다.)
파리를 잡는다고 나에게 주어지는 보상도 없다. 그저 바닥에 떨어진 파리를 손으로 주워야 하는 작업만이 생길뿐.
위의 밀대와 파리의 케이스에서 공통점은 그 순간의 중요성과 무관하게 내가 진정으로 그 상황에 '몰입'했다는 것이다. 몰입의 즐거움은 이처럼 중요하지 않고 사소한 일에도 그 위용을 아낌없이 뽐낸다.
이 말고도 우리가 몰입할만한 것들은 살아가면서 수 없이 많을텐데, 더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일에 몰입할 수 있다면 밀대질과 파리잡기에 비해서 얼마나 더 뿌듯하고 즐거울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처음에는 따분하고 재미없던 일도, 그 일을 잘 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내서 두 시간 걸릴 일이 한 시간으로 작업으로 마무리될 때, 우리는 그 순간에 심취하고, 몰입하여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아무리 하찮고 대단하지 않은 일이라도 당장 내 앞에 주어진 과제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