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여행기(251009목)
논리와 이성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게 하는 기준이 되건만, 세워진 기준이 튼튼하다고 자신하는 만큼 그 괴리가 느껴지는 순간에는 이내 우스워지고 말아요.
비행기보다 자동차가 훨씬 위험하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알고 있지만, 급정거하는 자동차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끼며 난기류를 타는 비행기 안에서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난기류를 만나 휘청거리는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들은 뛰어다니며 승객들을 앉히느라 부산스러운 모습에서 내 모습이 겹쳐 보이니 옛 생각이 났습니다. 녀석들이 혹시나 버스에서 다칠까 봐 정작 내 안전벨트는 채우지 못하는 현장체험학습날의 아침이요.
[놀랍게도 살면서 가장 맛있었던 비빔밥, 역시 금강산은....]
예정된 비행시간 5시간이 휴식이 되리라 기대했지만, 밤을 꼴딱 새우고 비행기 안에서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눈이 뻑뻑한 정도를 보니 내 신체는 지금 당장 침대에 눕기를 바라고 있겠군요. 하지만, 나는 아주 먼 곳의 공항에 도착을 하였고, 그곳의 시곗바늘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외국으로의 여행도, 비행기를 탑승하는 것도 여러 번 경험했지만 이 과정을 혼자 해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별거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 온 신경은 혹여나 생길 수 있는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있었나 봅니다.
숙소를 향하는 택시에서 밀려오는 피로감을 애써 떨쳐내지 않으려고 하니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푹 잤습니다. 기사님이 나를 불러 깨우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숙소 앞이었어요. 역시 괴리가 느껴지는 순간에는 우스워지고 마는군요.
여행 일정 중 단 하루만이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었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의 애벌여행이 꽤나 밀도 있었던지라 체크인이 끝나고 잠깐 눈을 붙이고 나니 훌쩍 몇 시간이 지나고 말았어요.
[출국 하기 전의 짧은 여행에서 만난 New 냉면 우주옥]
이럴 줄 알고 비행기를 타기 전에 오히려 나를 혹사시켰던 것도 있죠. 호텔의 정돈된 침구를 흩트려놓지도 못하고 그 위에서 새우잠을 청했지만, 눈을 뜨니 몸은 개운하고 정신은 맑았습니다. 드디어 푹 쉬어도 되는 공간에서 푹 쉬었네요.
먼저 밥을 먹어야 할까, 아니면 구경을 떠나야 하나 고민을 해보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
배가 곯아있는 상황에라 뭐라도 넣어야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겠노라 역정을 내는 배꼽시계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음식은 그 충격을 줄여주는 완충 역할을 해내지만, 일단 오리지널을 경험해 봐야 변주의 강도를 이해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기초 회화를 짧게 공부한 다음에 필수적인 물건들만을 챙겨 길거리로 나섰습니다. 요즘 번역기는 예전과는 달라서 손으로 입력할 필요도 없고, 버튼 하나만 누르면 외국인과의 의사소통을 충분히 가능하게 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서 우연히 외국인들을 만나는 상황에서 짧은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에게는 조금 더 친절해지는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몸으로 부딪히기로 결정했습니다.
바디랭귀지와 짧은 회화 정도면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 정도야 재미있는 콘텐츠가 될 뿐이죠. 설사 내가 원하는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요.
구글 지도를 이리저리 넘겨보면서 한국어로 번역된 깔끔해 보이는 식당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의 진정한 맛은 캐치테이블에 찍힌 숫자 30을 보고 근처 어디에선가 시간을 때우다 겨우 겨우 맛보는 외국어가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는 친절한 종업원이 상주하고 있는 식당보다는, 간판이 낡아있고 할머니가 투박한 쟁반에 음식과 반찬을 툭 내놓는 곳이 조금 더 우리의 그것과는 비슷하니까요.
막상 내 입맛에 맞지 않더라도 나는 현지인들이 즐기는 음식을 먹어보고 판단을 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날을 위해 고수를 씹고, 오뚝이 똠양꿍을 삼키던 수행의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요.
[고된 수행의 결과 : 향채를 즐기는 한국인이 되었다.]
관광객은 얼씬 도하지 않을 것 같은, 한국인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한국어는커녕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종업원이 있는 식당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바디랭귀지와 몇 개 주워들은 단어를 이용해서 만족스러운 음식을 골랐고, 친절히 먹는 방법을 알려주셔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습니다. 시키지 않아도 리뷰를 작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죠. 이 정도면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알겠죠?
늦게 합류한 친구의 짐을 푸는 것을 도와주고 관광을 시작하면서 서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주제가 있어요.
"해서 상황을 개선시킬 여지가 없는 말과 행동은 할 필요가 없다."
직관적으로는 저렇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필요 없는 말과 행동을 많이 하던가요. 하고 나서 후회하고, 생각하지 못하고 해 버리고,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뱉어버린 그것들 말이에요. 그런 일이 다들 자주 있잖아요. 성인군자가 아닌 사람이라면 다 그렇잖아요.
긁어 부스럼이라는 말도 어울리고요. 무언가를 하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고요. 하지 않는 것에도 노력이 필요하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해버리면 노력이 필요하지 않아요.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것은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수증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외부의 개입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인간은 그 자체로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는 존재이기에 아니, 생명이란 것은 다 그렇기에. 사람인 나도 나의 본성을 거스를 필요가 있어요. 노력이라는 비용을 끊임없이 투입을 하면서 말이죠.
내가 상대방의 행동에 한 마디 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과연 이 말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 봄이 좋겠습니다. 단기적이던 장기적이던 말이죠.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상대의 잘못이 명백한 상황에 그 점을 상대도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어요. 그렇지 않아도 민망함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반발심까지 심어줄 필요는 없죠.
내가 말을 한마디 얹어버리는 순간, 상대의 행위는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강요에 못 이겨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게끔,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잖아요. 공부하려고 맘먹었는데, 누군가 나게에 공부하라고 잔소리를 하면 공부하려는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죠. 잔소리를 듣고 공부를 하게 된다면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서 행위하게 된 것이니 주체성이 훼손되는 모양이고, 그 말을 듣고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결정해서 하고 싶을 때 공부를 하겠다는 미룸의 핑계가 생기는 모양이죠.
물론 잔소리를 안 했다면 계속 시간을 보내며 게으름을 피웠을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니 단정 지을 수는 없죠.
거리낌 없는 선택과, 수많은 실수 속에서도
'하지만 살았죠?' , '그렇지만 즐거웠죠?'를 외치며 5일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일상과는 거리가 떨어진 여행에서의 마음가짐을 평소의 순간에 빌려와 나눠야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신기하게도 무엇인가 꼬여버려 불편함이 올라올 수 있는 순간에도, 내가 여기에 열을 내 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한 발자국 떨어져 관망을 하니 결국 문제가 문제가 아니게 되거나 해결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클룩으로 예약한 체험 장소를 접수하는 곳으로 가라고 하니 거기에서 아니라는 답변만 돌아오거나 비행기에 수하물을 위탁하려 하니 두 명 중에서 한 명분만 가능하다는 답변이 돌아왔을 때에도 말이죠.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텅 빈 시간은 사람을 맑게 해 주어요. 맨날천날 그러고 있는 사람 말고요 평소에 좀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한정해서 말이죠.
멍 때리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고, 채워야 하는 시간을 더 밀도 있도록 해주는 완충으로 삼아야 해요. 여행의 일정이 길었던 만큼 아무 생각 없이 늘어질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너무 기뻤습니다.
사실 지금 너무 피곤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늘어져있고 싶었는데, 여행 내내 늘어져 있었으니 지금은 뭐라도 두들기고 싶어서 생각나는 대로 끄적이고 있어요. 여행의 후기라고 말하기에는 어디에 갔는지 무얼 먹었는지에 대한 언급이 아무것도 없어서 우습고요.
저는 일상의 사소한 스트레스나 갈등을 좀 과장해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분노'라고 표현합니다. 저렇게 과장해서 말을 해야 경계가 잘 되어서 나름의 방법이에요. 이번 여행은 3개월치 분노를 상쇄할 수 있는 '분노의 마이너스 통장'을 뚫어낸 값진 여행이었습니다.
왜 3개월이냐고요? 3개월 뒤면 군생활이 '거의' 끝나니까요.
하지만 복귀하자마자 스테이플러에 타카 심을 끼워 넣어 스테이플러로 cpr을 하는 기행과 그 심을 빼려다가 종이를 반으로 찢어버리는 일이 생겨 스테이플러에 분노하는 나를 보며 옆 사람이 한마디 하더랍니다.
"3개월치 분노 마이너스 통장 뚫었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한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