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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고래 May 03. 2023

색(色)을 아시나요

산란한 핑크 홍화꽃잎색



예전에 길을 걷다 보면 도를 아시나요?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이 많이 줄어서 흔치 않은 일이지만 한동안 거리에서 그런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이 다반사였던 적이 있다. 


주로 돈을 목적으로 길거리에서 일방적 포교 활동을 일삼는 무리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클리셰 중 하나로 거리에서 포교활동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기까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바쁘다고, 관심 없다고 거절을 해도 악착같이 달라붙는 통에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오늘 홍화염색을 하면서 우습게도 색을 아시나요?라는 질문에 스스로 빠져버렸다.


도와 색 사이 연관점이 있을까 물론 없다. 내가 꽂힌 것은 아시나요?라는 질문이 이었다. 무언가를 아시나요라고 물었을 때 딱 잘라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하기가 민망해서였다. 알겠다고 하면 얄팍한 지식의 한계가 있어 보였고 모른다고 하면 무식함의 바닥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냥 대충 얼버무리며 뭉그적 거리곤 했다. 알고 모름의 경계에서 고슴도치처럼 발가락을 새워 두리번거리며 허둥대던 기억, 그러나 이제는 담담하게 대답할 수 있다. 누가 나를 어찌 보는가에 대한 불필요한 소모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홍화염색을 몇 년 만에 다시 해 보았다. 홍화꽃잎을 빻아 동그랗게 떡갈비 모양으로 빚어 건조시킨 꽃잎을 하얀 자루에 넣어 따뜻한 물에 1시간 동안 조물거리며 노란색과 붉은색 꽃물을 빼어냈다. 그리고 다시 물을 갈아 주무르다 보면 노란색 기는 거의 사라지고 붉은색이 살아난다. 여기에 탄산칼륨을 넣고 색을 빼내면 산란하면서도 화려한 핑크색으로 염색할 수 있는 염색물을 추출해 낼 수 있다. 


거의 2시간 동안 홍화를 만지작거리며 추출한 염색물에 하얀 모시천을 담그는 순간 산철쭉처럼 진한 핑크가 피어났다. 천에 색을 입히기까지 또다시 한 시간, 순간 "우와! 예쁘다"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 색을 물감이름에 비교하자면 오페라색이다. 이렇게 화려하며 선명한 색, 홍화꽃색을 아시나요 라는 질문에 무어라 답을 할까? 


나는 산란한 핑크라는 답을 찾아내었다. 강열하면서도 품위 있어 보이는 핑크, 이색은 마치 스페인의 플라멩코와 닮은 듯하다.  농염한 집시의 미소와 화려하되 과하지 않게 절제된 동작으로 관객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플라멩코, 앞뒤 구두 발끝에서 박자처럼 튀어 오르는 리듬과 동작의 크기에 따라 주름진 치마폭이 펼쳐지며 자연스레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커다란 꽃잎의 형상은 화려한 축제의 꽃이 된다.   

홍화염색으로 만들어낸 색이 바로 이 춤의 느낌과 흡사했다. 드라마틱한 색의 변화, 노란색과 주황빛을 닮은 꽃잎에서 어찌 저리 화려한 핑크가 만들어질까? 


지금까지 살면서 저렇게 산란한 핑크색을 띠어본 삶의 모습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인생의 나이에 빗대어 보자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의 산란하면서 희망이 몽글몽글 쌓이던 기억, 발그레한 홍조를 띤 아기의 미소에 마음이 녹아내리던 시절, 잠시나마 그때를 생각하니 기운이 났다. 홍화꽃잎처럼 선연했던 추억은 쉽게 잊어버리리 말아야겠다. 삶의 고비마다 지난 앨범 펼치듯 꺼내어 보면 나이 들어 사그라지는 열정에 지금도 괜찮다고 토닥거리며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충분한 동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더불어 또다시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용기가 움트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홍화꽃 염색을 하면서 또다시 인생을 배웠다.   


마른 홍화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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